로마서강해 26차 로마서 9장 30-33 20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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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강해 26차 로마서 9장 30-33 2021.5.2.2021-05-02T17:16:46+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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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로마서 9장 14-29절을 통해서 주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살펴보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의 교훈을 듣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실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하나님께 긍휼히 여기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에 대하여 얼마나 감사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정말 감사한다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감사하겨 이겨낼 수 있습니다.

    둘째로, 바울이 토기장이와 진흙 비유를 말한 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운명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주재권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남은 자만 구원을 받는데 그것이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말미암는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절대 주권을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에만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찰스 어드만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구원받을 만한 자격을 가진 사람을 정죄하는 데 사용된 적이 없다. 오히려 멸망받아야 마땅한 사람을 구원하는데만 사용되었다.”고 말했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만 절대주권을 사용하시기에 항상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옳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한번 따라서 합시다. “항상,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옳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로마서 9장의 결론에 해당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10장의 서론이 되기도 합니다. 먼저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30)라고 질문합니다. 이는 앞서 14절에서도 말한 바 있습니다. 왜 바울이 이를 반복했을까요? 한마디로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엇을 강조하기 위해서 일까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대하여 그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긍휼의 그릇으로 선택하시든지 진노의 그릇으로 선택하시든지 마음대로 하실 수 있기에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아직도 하나님께서 누구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고 구원자이심을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건져주신 구원자이심을 믿고 있다면 어떻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라고 주문한 후, 이스라엘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데 실패했는지를 설명합니다. 본문 30-31절을 다시 읽습니다.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한마디로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데 실패한 것은 그들이 의를 좇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에는 ‘의’라는 단어가 여러 번 등장하는데 다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세 번 나오는데, 첫 번째 ‘의를 좇지 아니한’과 세 번째 ‘의의 법을 좇아간’에서 ‘의’는 율법을 뜻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의를 얻었으니’에서 ‘의’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이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율법을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율법을 ‘의’라고 표현하기 때문에 다소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율법 자체를 부정적으로 말한 적이 없습니다. 도리어 선하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문제를 삼는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율법에 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율법을 대하는 태도에 어떤 문제점이 있었습니까? 그들은 율법을 열심히 지키면 의롭게 된다고 생각하고 율법을 열심히 좇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이 왜 율법에 대한 잘못된 태도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는 성경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시간 관계상 세 곳만 찾아보겠습니다.

    먼저 로마서 320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다음은 갈라디아서 216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다음은 갈라디아서 311입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세 구절에서 공통적으로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는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나면서부터 죄인인데 어떻게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강아지와 같이 산다고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또 여성이 남성의 옷을 입으면 남성이 될 수 있습니까? 호박에 줄을 긋는다고 수박이 될 수 있습니까? 불가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지키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율법을 좇아가는 것은 율법에 대한 잘못된 태도이고,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방인이 율법을 좇지 않았는데도 어떻게 의롭게 되었는지를 말합니다. 30절을 다시 읽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바울은 이방인이 ‘믿음에서 난 의’를 얻었다고 말합니다. ‘믿음에서 난 의’라는 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의를 뜻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를 얻게 하는 믿음의 실체를 생각해야 합니다. 즉 이방인이 무엇을 믿었기에 의를 얻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의 서두에서 ‘그 믿음’에 대해 분명히 밝혔습니다. 로마서 116-17을 다시 읽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무엇을 믿으면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복음입니다. 복음이 무엇일까요? 문자의 뜻은 ‘기쁜 소식’, 즉 ‘복된 소식’입니다. 이는 ‘3분복음메시지’ 서두에 나와 있는 것처럼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복음이라고 할까요? 모든 사람은 아담의 후손으로 죄인이므로 한번은 죽어야 하고 죽은 후에는 반드시 심판을 받아 지옥에 던져져 영원히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죄 문제를 해결하려면 누군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죄인이므로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죽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복음, 즉 예수께서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무엇에 근거해서 복음을 믿으면 의롭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까? 33절을 다시 읽습니다.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기록된 바’는 이런 사실이 이미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원래 이사야 2816절과 814이 합쳐진 것입니다. 시간 관계상 찾는 것은 생략합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28:16). 그가 성소가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8:14).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 구약성경에 기록된 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구약 시대에도 이미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구약 시대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고, 신약시대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나 죄인이 의롭게 되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이런 사실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쉽게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께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포로로 잡혀간 조카 롯을 구한 후, 환상 중에 그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그러자 아브람이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그리고는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자 여호와께서 그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창 15:6). 즉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은 것은 그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 32편 1절에서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 성경을 잘 알고 있었지만 율법을 지켜야 의롭게 된다고 생각하고 복음을 전하러 오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음을 믿지 않자 어떻게 되었다고 말합니까? 32을 다시 읽습니다.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한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이 아니라 행위를 의지했기에 부딪힐 돌에 부딪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딪힐 돌’은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셨는데 행함으로 나갔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부딪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돌에 부딪혀 보았습니까? 아직 부딪혀 보지 않았다면 얼마나 아픈지를 알기 위해 굳이 부딪힐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책상의 모서리에 부딪혀도 엄청난 고통을 느끼는데 만일 돌에 부딪혀 보십시오. 그것도 반석에 부딪혀 보십시오.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복음을 믿고 구원받았기에 이 말씀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원리는 우리에게도 적용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었지만 그들이 믿음으로 나가지 않고 행위로 의롭게 되려고 하다가 부딪힐 돌에 부딪혀 파멸에 이르게 되었듯이, 우리도 복음을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가지 않고 행함으로 나가면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계속해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으로 구원받았기에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라고 말한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일제 강점기에 큰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일본이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고초를 당한 목회자가 있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목회자도 있었습니다. 후세에 남겨둔 재산이 없었기에 ‘아름다운 빈손’으로 불리는 전 영락교회 故 한경직 목사님도 신사 참배를 했습니다. 해방을 맞이한 후 신사참배를 거부한 한상동 목사와 주남선 목사를 중심으로 고려신학교(현재 고신대학교)를 세우고 별도로 고려파 총회를 설립하므로 최초로 한국교회 장로교는 분열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신사참배를 하지 않아 옥살이한 고신측의 교회들은 대체로 부흥이 되지 않고, 신사 참배를 하고 감옥에 가지 않은 교단측 교회들은 부흥이 되었습니다. 왜 그런 현상이 벌어졌을까요? 신사참배를 하지 않은 자들은 이를 그들의 의로 여기고 신사참배한 자들을 정죄하였지만, 신사 참배한 목회자들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신이 말씀대로 살아도 이를 자신의 의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를 주장하는 것은 교만이며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고개를 드는 순간 심판이 문 앞에 다가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통합 측 교단의 신성교회에서 24세에 총각 서리 집사가 되었고 아동부 부장 집사를 맡았습니다. 일반대학 졸업식을 앞두고 40일 금식에 들어갔는데 30일째 되는 날 해군 장교 시험에 합격했다는 통지를 받고 그만두었습니다. 그 후로 20일 40일 장기 금식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나이에 어떻게 장기 금식을 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또 20-30명 정도 되는 아동부를 맡아서 3개월 만에 120명으로 부흥시켰고, 6명이던 청년대학부를 6개월 만에 30명으로 부흥시켰습니다. 그들 중에는 제가 대학 시절에 전도한 박근혜 정권 노동부 이기권 장관, 문재인 정부 문체부 박양우 장관 등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 대전 침신 신대원 재학 당시는 새벽 4시에 일어나서 8시까지 성경을 읽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7년 동안 부교역자로 사역할 때 제가 맡은 부서는 큰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가 분당에 개척하면 1년 안에 크게 교회를 부흥시킬 것이라고 말했고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처음에는 분당에서 잘 성장한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그러나 IMF를 맞아 핵심 멤버들이 교회를 다 떠났고, 결국은 경매로 교회의 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지방에서 도와달라고 갔는데 교인들이 저에게 은혜를 받자 담임목사님이 교회가 둘로 쪼개질 것을 우려하여 사임을 요구해서 2달 반 만에 그만두었습니다. 당시 친구인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나 장경동 목사는 대형교회를 목회하는데, 저는 계속해서 실패를 했습니다. 하루는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왜 다른 친구들은 목회를 잘하는데 저는 실패를 거듭합니까?” 그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몹시 교만하기 때문이다” 장기 금식을 여러 차례하고, 기도를 많이 하고, 가는 곳마다 부흥을 시킨 것으로 저도 모르게 영적으로 교만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교만하면 하나님께서 심판의 칼을 휘두르십니다. 아무리 의롭게 살아도, 아무리 말씀에 온전히 순종한다 해도, 아무리 목숨까지 바쳐서 죽도록 충성한다고 해도, 그것을 자신의 의로 삼는 순간 그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임을 알아야 합니다. 더처치가 기존 교회와 달리 성경대로 사역하려고 노력한다고 다른 교회를 비판하고 정죄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한국교회가 바로 설 수 있도록 주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의를 붙잡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으므로 저주가 아닌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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