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18 로마서 7장 1-6절 2021년 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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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강해 18 로마서 7장 1-6절 2021년 2월 14일2021-02-15T11:10:03+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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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로마서 6장 15-23절을 통해서 몇 가지 주의 교훈을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고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하여 주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은혜를 받아 죄에서 자유함을 받았으면 당연히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에서 자유함을 받은 것을 기뻐하고 감사할 뿐, 다시 죄를 짓지 말아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에서 자유함을 받는 자는 동시에 다시 죄를 짓지 않아야 할 책임이 있는 자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둘째로, 바울이 자신의 일로 감사한 것이 아니라 로마교회 성도들이 죄의 종에서 의의 종이 된 것을 인하여 감사한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감사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자기 중심적인 감사에서 타자 중심적인 감사를 해야 하고, 육적인 감사에서 영적인 감사를 해야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그것이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신이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이라는 것을 항상 인식하고 자신을 의의 종에게 내주야 합니다. 그리고 ‘내준다’가 두 가지 의미, 즉 ‘드린다’와 ‘굴복 시킨다’는 뜻이 있는데 후자로 이해하고 날마다 자신을 의에게 굴복시키려고 힘써야 합니다.

    넷째로, 바울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다고 말하며 왜 그 마지막이 영생이라고 말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은 것과 거룩함의 열매를 맺는 것이 상관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영생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단지 영원히 산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의 생명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거룩한 열매를 맺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로마서 7장은 크게 1-6절, 7-13절, 14-25절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세 주에 걸쳐서 강해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로마서 7장 1-6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유대인 결혼제도를 통하여 율법의 한계성을 언급하고, 이를 신자들에게 적용시킵니다. 먼저 로마서 7장 1절을 다시 읽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바울은 형제들아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바울이 말한 법이란 무엇일까요? 로마교회는 본래 유대인 신자들을 통해 형성되었고, 그리고 이어 유대교에 관심을 가졌던 개종자들과 이방인 신자들이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기 때문에, 로마교회 성도들은 누구보다도 모세의 율법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여기서 말한 법이란 모세의 율법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2절에서 율법의 내용을 직접 소개합니다.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은 신명기 241-4의 내용을 언급한 것입니다. 신명기 241-4절은 결혼한 후 남편이 그 아내로부터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하면 이혼을 요구할 수 있지만, 아내는 어떤 경우에도 남편의 생전에는 이혼을 요구할 권리를 갖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의 생전에는 법으로 남편에게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은 후에야 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다른 남자와 재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렇게 유대인의 결혼제도를 언급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3을 다시 읽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이 말은 남편이 죽은 후에는 남편에게서 벗어나기 때문에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도 아무런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교회 성도들은 이런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를 다시 언급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인의 결혼제도를 통하여 율법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아내가 남편 생전에는 결혼 법에 매여 꼼짝하지 못했지만, 남편이 죽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듯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갈 2:19). 그렇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기에 율법의 요구에 순종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 그리스도인들 중에 어떤 자들이 있었습니까? 복음을 믿고 구원받았지만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할례를 받아야 한다거나, 안식을 지켜야 한다거가, 각종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일은 오늘날에도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선행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율법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그 어떤 이유에서든지 율법을 행해야 한다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가 어떻게 율법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말합니까? 4을 다시 읽습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지금 바울은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남편에게서 자유한 것에 비유하여 율법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율법에서 자유하게 되려면 누가 죽었다고 해야 합니까? 당연히 율법이 죽었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율법이 죽었다고 말하지 않고, 너희도 그리스도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가 직접 죽었다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 몸으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했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왜 율법이 죽었다고 말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을까요? 율법도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죽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율법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대로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므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율법의 요구를 이행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율법의 요구를 이행하지 않아도 율법의 요구에서 자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번도 죽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율법에서 해방된 것에 대한 감격과 기쁨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출옥을 해도 기쁘고 감사한데 어떻게 율법의 저주인 죽음과 지옥에서 영원히 해방되었는데 이에 대한 감격과 기쁨이 없을까요? 내가 죽지 않고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율법에서 해방된 것이 어떤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해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자유를 맛보려면 자기 자신이 죽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죽음에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 곳에서 내가 죽었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몇 군데를 찾아보겠습니다. 로마서 6장 4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로마서 66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로마서 611절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갈라디아서 220절입니다.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성경은 곳곳에서 거듭해서 우리가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믿고 실재화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지만 말고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어도 실제로 죽는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변화된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음과 같이 바울처럼 고백하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한 것을 실재화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합니다.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2:20).

     

    그런데 바울은 예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를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4절 하반절입니다.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가서’입니다. 이것이 원어로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보았더니 우리말로 ‘가서’라는 의미가 전혀 없었습니다. NIV는 ‘belong to’로, 표준새번역은 ‘속하였다’로, KJV 흠정역은 ‘결혼하다’로 번역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단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은 것에 멈추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과거에는 율법과 결혼한 자로 살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와 결혼한 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과거에 율법에 매였던 삶을 청산하고 예수님과 결혼한 자로 살아가야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우리가 어떻게 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51-8을 읽습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15:1-8).

    예수께서 반복해서 사용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무릇 내게 붙어 있어’(2),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4), ‘내 안에 거하라’(4), ‘그가 내 안에’(5), ‘사람이 내 안에’(6),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7). 계속해서 붙어 있어’, ‘내 안에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친밀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하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을 위한 열매는 맺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삶 속에서 그리스도와 연합을 유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열매를 맺기 원하다면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3분복음메시지’를 무한 반복하면 됩니다. 왜 그럴까요?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하는 것인데, 날마다 ‘3분복음메시지’를 암송하면 예수께서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다시 5-6을 읽습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라.” 바울은 5절에서 육신에 있을 때는 율법을 통하여 죄의 정욕이 우리의 지체 중에 역사하고 죽음을 가져오는 열매를 맺는 삶이라고 말하고, 6절에서 율법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하고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바울은 율법에서 벗어나기 전의 삶과 그 후의 삶을 대조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율법에서 벗어나기 전후의 삶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율법 아래 있을 때와 벗어난 후의 삶은 비교 불가입니다. 율법에서 벗어나기 전에는 무엇을 해도 죽음뿐이었지만, 율법에서 벗어난 후에는 의문의 묵은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라가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영의 새로운 것’이 무엇을 가리키냐에 대해서는 견해가 다릅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표준새번역을 소개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자를 따르는 낡은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성령이 주시는 새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무슨 말입니까? 율법 아래 있을 때는 문자적으로 성경을 해석하여 겉으로 하나님을 섬겼지만, 지금은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으로 해석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즉 문자를 따르는 낡은 정신으로는 말씀대로 살아갈 수 없지만 성령께서 주시는 새 정신으로는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5장-7장을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모세의 율법보다도 더 지키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 제7계명은 ‘간음하지 말라’고 하지만, 산상수훈은 뭐라고 말합니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5:28). 율법은 드러난 행동을 보고 간음했다고 말하는데 산상수훈은 음욕만 품어도 이미 간음했다고 말합니다. 즉 율법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으로 그것이 죄인지 아닌지를 판단하지만, 산상수훈의 말씀은 행동으로 옮겨지기 전 마음에서 일어난 것으로 죄인지 아닌지를 판단합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마음의 죄를 짓지 않게 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한 가지 숙제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직도 율법의 영향아래 거할 때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난 행동을 보고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다른 사람의 죄를 비판하고 정죄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정상입니다. 어제부터 ‘미움받을 용기’(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를 읽고 있습니다. 특별히 와닿은 표현이 있습니다. “과거를 바꿀 수 없다고 현재와 미래의 내 모습마처 바꿀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사람도 변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의미 율법에서 벗어났고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시므로 얼마든지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새 정신으로 변화의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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