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15차 롬 5:12-21, 202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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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강해 15차 롬 5:12-21, 2020.1.242021-01-24T10:01:56+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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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로마서 5장 1-11절을 통해서 몇 가지 주의 교훈을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고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하여 주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첫째로, 바울이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를 사용하면서 굳이 원인에 해당하는 부분을 다시 언급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칭의를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칭의를 강조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의로 하나님께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건강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듯이, 칭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둘째로, 바울이 칭의를 얻은 자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려야 하는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첫째로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소통이 없는 화평은 전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기도하지 않고 있다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람과도 화평해야 합니다. 십자가가 수직과 수평이 교차로 만들어지듯이 하나님과 화평을 얻은 자는 사람과도 화평해야 합니다. 따라서 누군가와 화평하지 못한 것은 화평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바울은 칭의를 얻은 자는 세 가지 이유로 기뻐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참여할 소망이 있기 때문이고(2절), 둘째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낳기 때문이고(3절), 셋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11절). 그렇습니다.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하심을 얻었기에 세상에서 어떤 일을 만나도 기뻐해야 합니다. 기쁨은 그리스도인의 뱃지입니다. 어떤 이유든지 기쁨을 잃고 있다면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죄를 원죄와 자범죄로 구분하거나, 원죄와 본죄와 자범죄로 구분합니다. 저는 둘로 구분합니다. 12절을 다시 읽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한 사람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고 모든 사람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은 누구나 원죄를 갖고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만 이런 주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에서도 자신이 죄를 범하지 않아도 죄인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연좌제입니다. 이는 범죄인과 특정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연대책임을 지게 하고 처벌하는 제도입니다. 이는 형법상의 형사책임 개별화의 원칙이 확립되기 전까지는 고대로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편적인 제도였습니다. 우리나라도 조선 후기까지 반역죄를 범한 경우 그의 친족·외족·처족 등 3족이 처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헌법 제13조 3항은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므로 연좌제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 원죄론을 주장하면 연좌제를 연상하여 거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원죄론과 연좌제는 전혀 성격이 다릅니다. 범죄인과 특정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연대책임을 지게 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적용의 영역이 전혀 다릅니다. 연좌제는 혈육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원죄는 영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왜 죽는다고 생각합니까? 늙고 병들기 때문에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는 옳은 생각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늙거나 병들지 않아도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따라서 기존의 생각을 바꾸게 해야 합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아담의 후손이므로 죄인이기 때문에 죽는다는 성경의 주장이 타당합니다. 왜냐하면 일상에서 대표성의 원리, 즉 대표의 행동이 구성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자녀가 부모의 외모나 성격을 닮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가 원해서 부모의 외모와 성격 등을 닮는 것이 아닙니다. 본인이 원치 않아도 부모의 영향을 받습니다. 둘째로, 부모의 질병이 자녀에게 유전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하지 않았는데 알레르기 질환, 난청, 근시와 사시, 자폐증, ADHD, 각종 암 등이 발견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셋째로, 운동경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와 일본이 축구 경기를 했는데 우리나라가 이기면 기쁘고 지면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왜 본인이 경기하지 않았는데 이런 반응을 보일까요? 축구 선수들이 크게는 국가를 대표하지만 작게는 우리를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아담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본문 로마서 5장 12-21절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한 사람’입니다. 자그마치 8번이나 나옵니다. 바울은 ‘한 사람’을 이중적으로 사용합니다. 하나는 아담을 가리키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즉 바울은 두 족보를 제시합니다. 아담의 족보 안에 있으면 죄인이라 사망에 이르게 되고, 둘째 아담의 족보에 있으면 의인이라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것에 착안하여 15년 전에 출간한 전도소책자가 ‘족보 이야기’이고, 몇 년 전 수정하여 출간한 것이 ‘두 사람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두 족보를 거론하면서 아담을 오실 자의 모형이라고 말합니다. 13-14절을 다시 읽습니다.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모형은 실물을 모방하여 만든 물건입니다. 따라서 아담이 오실 자의 모형이라는 말은 첫 사람 아담은 둘째 아담인 예수님의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즉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왕 노릇한 것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고 영생을 얻게 될 것을 미리 보여준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바울이 아담의 죄로 모든 사람이 죽음에 이르렀다는 원죄론을 말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원죄론을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이야기하려고 한 것입니다. 즉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누릴 축복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의 족보 안에 있는 자는 절망적입니다. 반면에 둘째 아담의 족보 안에 있으면 소망이 넘칩니다. 저와 여러분의 운명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따라서 큰 복을 받은 자답게 아담의 족보 안에서 살았던 옛 모습을 버리고 둘째 아담의 족보 안에서 새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첫 사람 아담과 관련하여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담이 첫 사람이냐 아니면 아담 이전에도 사람이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아담이 첫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자가 바로 비성경적 귀신론으로 기독교 이단 판정을 받은 성락침례교회의 김기동 원로 목사입니다. 그러나 그의 신학은 귀신론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아담 이전에도 사람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을 잘못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장 7-8절을 읽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본문에 ‘사람’이 세 번 등장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든 ‘사람’과 그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된 ‘사람’을 구분하고,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거하게 하신 아담은 후자라고 주장합니다. 즉 생기를 불어넣기 전에 흙으로 만든 사람과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된 사람을 구분합니다. 그러나 원어로 ‘사람’은 모두 동일합니다.

    그러면 그가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창세기 415절 말씀 때문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우리가 알다시피 아담의 첫 째 아들이 가인이고 둘째는 아벨입니다. 그런데 가인이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러면 가인만 남아 있는데 어떻게 가인을 죽이는 자가 있고, 가인이 만나는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신다고 하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다른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실제로 가인을 죽이는 특정 인물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인을 죽지 않도록 보호하신다는 것을 강조한 표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다른 하나는 창세기 64절에 등장하는 네피림때문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창세기 5장에는 아담부터 노아에 이르기까지의 족보를 소개하고, 6장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들이 있는데 그들을 ‘네피림’이라고 불렸습니다. 네피림은 ‘거인’, ‘용사’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 ‘사람의 딸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난해 구절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네피림이 아담의 후손보다 신장이 훨씬 컸기 때문에 이들이 아담 이전에 있던 자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유로 이런 주장을 하면 안 됩니다. 같은 부모에게 태어났어도 큰 자가 있고 작은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담 이전에 사람이 있었다고 주장하면 절대로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26절을 읽습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은 한 사람, 즉 아담의 혈통에서 태어나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모든 사람은 아담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아담 이전에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일 아담 외에 또 다른 사람이 있다고 하면 예수님 말고 또 다른 사람이 대신하여 죽어야 합니다. 오직 한 사람 아담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온 것처럼, 오직 한 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첫 사람 아담과 둘째 사람 예수가 각각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설명합니다. 15-19입니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또 이 선물을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바울이 공통적으로 사용한 단어가 무엇인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6절에 한 번, 15절, 18절, 19절에 각각 두 번씩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많은’입니다. 한 사람 아담 때문에 많은 사람이 범죄했고, 한 사람 예수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의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첫 사람 아담은 땅에 속했고, 둘째 사람 예수는 하늘에 속했기 때문에 각각 미친 영향은 땅과 하늘만큼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즉 한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많음’의 내용이 결정됩니다. 아담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어 사망에 이르렀고, 예수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어 생명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공동체성을 가집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공동체 구성원 ‘한 사람’을 중시합니다. 따라서 한 사람의 역할을 경시하면 안 됩니다. 스티븐 스틸버그 감독이 만든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거의 다 보았을 것입니다. 독일인 사업가이며 냉정한 기회주의자 쉰들러가 우연히 유대인 회계사 스턴과 가까워지면서 나치에 의해 참혹하게 학살되는 유대인을 구하는 내용을 다룬 영화입니다. 그 영화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장면이 있습니다. ‘한 명의 유대인’을 더 살리지 못했다고 한탄하며 비통한 울음을 터뜨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눈물과 함께 매우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 한 사람이 1,100명을 살렸다는 것입니다. 만일 쉰들러와 같은 사람이 1,000명만 더 있었더라면 유대인은 백만 명이 학살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은 점점 악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마저도 돈을 구원자로 삼고 이 세상의 성공을 향해 달음질치고 있습니다. 그런 무리에서 빠져나오는 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많은 사람을 죄인이 되게도 하고, 의인이 되게도 한 결정적인 원인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8-19을 다시 읽습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한 마디로 첫 사람 아담은 불순종하므로 많은 사람을 죄인이 되게 했고, 둘째 아담은 순종하므로 많은 사람을 의인이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즉 불순종과 순종이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불순종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과 우리가 주종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종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주인의 뜻에 반하는 종은 존재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주인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첫 사람 아담처럼 불순종하지 말고,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처럼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지키심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신 것입니다. 20-21을 다시 읽습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반복해서 사용된 단어가 무엇입니까? ‘은혜’입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호의입니다. 즉 내가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아담처럼 순종하지 못하지만, 예수께서 대신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우리의 의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2021년,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말씀에 순종할 기회를 열어주셨습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할 수 없지만 주 안에 거하면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가서 제자 삼으라’는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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