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14 로마서 5장 1-11절 202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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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강해 14 로마서 5장 1-11절 2020.1.172021-01-17T10:08:18+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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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로마서 4장 18-25절을 통해서 몇 가지 주의 교훈을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고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하여 주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첫째로,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는 것믿는 것중 무엇이 우선이냐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아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지만, 바울은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것을 예로 들면서 믿는 것이 먼저라고 주장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므로 믿는 것이 아는 것을 우선합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했음에도 바울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을 통해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칭의를 받게 하신 후에도 여전히 칭의의 원리로 우리의 믿음을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칭의는 우리가 구원받을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의롭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믿음이 흔들려도 흔들리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예수님의 대제사장 기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나이다”(7절)고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셋째로,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정체를 무엇이라고 말하느냐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상황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신념과 믿음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이 확신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자신의 생각을 확신하는 것은 신념이고,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넷째로, 바울이 아브라함의 칭의 사건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과 연관시킨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따로 읽지 말고 신약을 통해 구약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은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신약을 통해 구약을 읽어야 그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1절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러므로’는 원인과 결과를 나타내는 접속사입니다. 앞서 살펴본 것은 칭의에 관해서입니다. 즉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처럼 우리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으면 의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칭의는 다시 말하지 않고 결과에 해당되는 것만 말하면 됩니다. 즉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고 말하면 됩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렇게 원인에 해당되는 부분을 다시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즉 사람이 의롭게 되는 길은 오직 믿음이지 율법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왜 바울이 이것을 강조할까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의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계속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자기의 의를 주장하는 것이 인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우선 하나님과 화평을 누려야 한다 말합니다. 1절을 다시 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화평을 누려야 한다고 말한 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칭의를 얻기 전까지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을 만드셔서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시면서 한 가지 즉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이를 어기고 선악과를 먹으므로 죄인이 되었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습니다. 그래서 본문 9절에서 우리가 ‘진노’의 대상이었고, 10절에서는 하나님과 ‘원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두 아담의 후손이므로 죄인이 되었고 저주와 하나님과 원수로 살아가다가 죽어야만 했습니다. 이런 운명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한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죄 문제를 해결받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죄 문제를 해결받으려면 누군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아담의 후손으로 죄인이므로 누군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이 세상에 오시지 않고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의인으로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죄 문제를 해결해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를 거짓 메시아로 알고 그를 따르는 자들을 박해하는 일에 자신의 인생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다메섹에 있다는 말을 듣고 예루살렘으로 그들을 잡아 오기 위해 대제사장의 위임장을 들고 240킬로나 떨어진 다메섹까지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으로 가던 중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가 핍박하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하나님이신데 자기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깨닫고 믿었습니다. 그러자 지금껏 율법을 지키려고 수고했어도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지 못했지만, 거듭난 후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므로 화평을 누리게 되었기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을까요? 저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사이좋게 지내야 합니다. 원수지간에는 서로 말하지 않습니다. 친밀한 교제는 더더욱 하지 않습니다. 개인이나 기업이나 국가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화평을 누린다는 것은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지려면 서로 가까이 해야 합니다. 이런 사실은 2절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들어감을 얻었으며’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프로사고겐인데 이는 예배자가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는 뜻입니다. 과거에는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오직 대제사장만 1년에 한 번 지성소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성소의 휘장을 찢으셨습니다. 그래서 따라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직접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있는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10:20). 이로 말미암아 그토록 유명한 ‘만인 제사장’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나라 대통령을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만날 수 있습니까? 대통령은 커녕 여러분의 가족도 여러분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만나서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우리가 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마음대로 만날 수 있습니까? 그것도 단체 미팅이 아니라 일대일 단독 미팅으로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보통 영광과 특권이 아닙니다. 이런 특권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기도는 살아있을 때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6)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 있다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과도 화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은 사람과도 화평해야 합니다. 따라서 사람과 화평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릴 수 없습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믿음을 강조하는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만 알아주시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실과 다른 것으로 오해받거나, 애매하게 고난당할 경우는 그런 생각이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만 좋게 맺으면 되고 사람과의 관계는 좋게 맺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면 사람과도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어느 계명이 제일 크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만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는 열심히 드리고 기도하지만, 사람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거나, 하나님께 헌금을 많이 드린다는 미명하에 사람들에게 인색한 것은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이번에 정인의 양부모 사건이나 BTJ열방센터의 방역비협조는 바로 이런 현상을 잘 반영한 것입니다. 바울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12:18)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정말 칭의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면 사람과도 화목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 안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2-3, 11을 읽습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2-3)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11)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즐거워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표준새번역은 ‘즐거워한다’를 ‘자랑한다’로 번역하고, 공동번역은 ‘기뻐한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저는 문맥상 ‘기뻐한다’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바울은 2-3절, 11절에서 ‘즐거워하느니라’를 세 번이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2입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바란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참여할 소망을 품는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는 것은 장차 하나님의 영광에 자리에 참여할 소망이 있기에 기뻐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특정한 날에 시상식에 참여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좀 힘들고 어려워도 그날을 소망하며 기쁨 가운데 살아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장차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참여할 소망을 품으면 얼마든지 기뻐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자녀도 이 땅에서 살아가므로 이 땅의 일로 인한 소망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힘든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나는 너의 방패요 상급”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진다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의 것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는 것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것은 지나가고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이 있기에 기쁨이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둘은, 3절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노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다만 이뿐 아니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기 때문만 아니라 환난 중에도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한 것은 환난이 환난으로 끝나지 않고 결과적으로 소망을 이룬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소망을 이룬다는 것은 희망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환난을 싫어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환난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희망을 갖게 하십니다. 그런데 희망을 낳은 환난이 되려면 그 과정에서 거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인내와 연단’입니다. 인내는 헬라어로 휘포모네인데 이것은 ‘… 아래 남다’라는 동사 휘포네오에서 나왔습니다. 즉 인내는 환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환난 가운데도 그 자리에 남아 있는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습니까? 내려오실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습니다. 그러자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과 땅 위에 있는 자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합니다. 혹 환난 중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피하려고 하지 말고 그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희망을 인하여 기뻐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연단’입니다. 이는 ‘시험하다’는 헬라어 동사 ‘도키마죠’에서 나온 ‘도키멘’이라고 하는데 이는 ‘시험을 견뎌낸 마음의 상태를 뜻합니다. 즉 육신의 정욕과 생각이 제거된 상태를 뜻합니다. 이는 마치 금속을 용광로에 집어넣고 모든 불순물을 제거하는 것과 같습니다. 욥은 세 가지 재앙을 당한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23:10). 금은 제련하는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순도 100%의 정금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연단을 받아야 세상의 욕심을 버리게 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순전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셋은, 11절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하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에서 기쁨을 찾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것입니까? 풍성한 소득입니까? 사회적인 명성입니까? 이런 것은 이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것도 우리에게 얼마든지 기쁨을 줍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 안에서’ 기뻐해야 할 이유를 설명합니다. 6-10절입니다.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바울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는지를 밝힙니다. 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연약할 때’ , 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10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에 있는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조건을 하나도 갖추지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찾아오셔서 우리를 사랑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사랑받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찾아오셔서 사랑해주셨습니다. 이것을 정말 믿는다면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찾아야 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20세기 최고의 강해 설교자로 불리는 로이드 존스 목사는 로마서 5장 1∼11절을 이해하지 못하면 로마서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을 강해하는 데 26시간을 사용했는데 로마서 5장 1-11절을 강해하는 데 무려 절반 이상을 사용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믿음으로 의인이 된 자는 마땅히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기쁨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기쁨을 살아가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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