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제 47차 롬16장 3-16절 202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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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강해 제 47차 롬16장 3-16절 2021.9.262021-10-03T07:56:3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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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로마서 16장 1-2절을 통해서 주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살펴보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의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바울이 뵈뵈가 여성인데도 불구하고 로마교회에 편지를 전달하게 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뵈뵈가 겐그레아교회의 일꾼이고 보호자였기 때문입니다. 일꾼은 섬기는 자라는 뜻이고 보호자는 재정적인 후원자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나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섬기는 자와 재물을 기꺼이 주님께 드리는 자를 사용하십니다. 주님께 쓰임을 받으려면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둘째로, 귀신을 섬기던 뵈뵈가 구원을 받아 교회의 일꾼이 되고 바울과 복음 전도자들의 보호자가 된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단지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계속 주님을 닮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다가 죽으면 천국 들어갈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지 말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도록 자라가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셋째로, 어떻게 뵈뵈가 바울과 복음 사역자들의 보호자가 될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뵈뵈가 단지 부자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어떻게 알 수 있다고 했습니까? ‘보호자’가 ‘보혜사’와 같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우리 곁에서 보살피고 은혜를 베푸시듯이 뵈뵈는 바울의 곁에서 사역을 하도록 경제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넷째로, 바울이 로마교회에 뵈뵈를 합당한 예절로 영접하고 그에게 소용되는 모든 것을 도와주라고 말한 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뵈뵈를 맞이하라고 한 것은 사도들이 받는 그러한 존경과 사랑과 경외함으로 그녀를 맞이하라는 뜻입니다. 이는 뵈뵈가 교회의 일꾼과 보호자가 되어 헌신했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헌신을 잊지 않고 갚아주십니다. 이 땅에서 뿐아니라 천국에서 영원히 보상해 주십니다.

    로마서 16장 3-16절에는 ‘문안하라’라는 말이 18번이나 등장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16장은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단지 인사를 한 것으로 생각하므로 이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초기 기독교 교부들이나 신학자들과 성경 주석가들도 이를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관심을 갖는다면 로마서 16장 3-4절에 등장하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뿐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이 바울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들이 바울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습니까? 바울이 복음 전도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16장에는 우리가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되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본문을 가지고 두 주에 걸쳐서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27명의 실명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름이 없는 사람이 있기에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습니다. 예를 들어, 13절의 ‘루포의 어머니’와 15절의 ‘네레오의 자매’입니다.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 가운데 27명 이상을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본문이외에도 21절에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등장하기 때문에 바울은 이보다 훨씬 많은 사람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은 로마교회에 가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로마교회를 개척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많은 사람을 알 수 있었을까요? 이전에 자신과 함께 동역한 자들이 로마에 가 있었고, 바울의 친척들도 있었고, 친밀하게 교제하던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저는 바울이 어떻게 로마교회에 이토록 아는 사람이 많은지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통하여 당시 로마교회가 어떤 공동체였는지를 아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자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당시 로마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우리나라 최초의 자생적인 교회인 송천교회를 보면 당시 교회가 어떤 교회였는지를 알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송천교회는 1883년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설립되었습니다. 동네 이름을 따서 송천교회라고 지었습니다. 송천(松川)을 우리말로 풀어쓰면 ‘솔내’인데, 발음의 변화로 ‘소래’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총신대 양지 캠퍼스에 가면 송천교회를 복원해 놓고 소래교회라고 했습니다. 당시 그 교회에 출석했던 20여 명의 명단이 남아 있습니다. 그중에서 몇 분만 소개합니다. 서경조 목사입니다. 이분은 우리나라 첫 장로교 목사입니다. 다음은 김규식 박사입니다. 이분은 우리나라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에 관여하고 상해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냈습니다. 다음은 마리아 여사입니다. 당시 사회적으로 유명한 여성 지도자입니다. 이런 분들이 송천교회 출신인 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당시 교회가 상당히 사회에 영향을 미쳤고, 교회 안에서 남성과 여성이 대등한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읽은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통해서 당시 로마교회가 어떤 교회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교회가 어떤 교회였는지를 살펴보려면 당시 로마 사회가 어떠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을 읽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이를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로마 시대는 사람을 셋으로 구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인종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둘째로, 사회 신분상으로 자유인과 노예로 셋째로, 성별로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했습니다. 따라서 로마교회 구성원의 이름을 보면 그들이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 노예인지 자유인인지, 여성인지 남성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인종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인종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이름을 보면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 알 수 있습니다. 3절에 나오는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입니다. 그들이 유대인인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도행전 18장 2절을 읽겠습니다.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브리스가는 브리스길라의 단축형입니다. 7절을 읽습니다.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내 친척’에서 ‘내’는 바울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이므로 그의 친척인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역시 유대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11절을 보면 “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가족 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헤로디온 역시 유대인입니다. 이렇게 볼 때 로마서 16장 3-16절에 기록된 로마교회 성도들 가운데 브리스가(브리스길라)와 아굴라(3절), 안드로니고와 유니아(7절), 헤로디온(11절) 등 5명이 유대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외에는 이방인들입니다. 이를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로마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한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 상황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은 어디서나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이방인을 얼마나 무시하고 폄하를 했는지 아십니까? 유대인들에게 “왜 하나님이 이방인을 만드셨는가?”라고 물으면, 그들은 “지옥불의 연료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런 시대에 로마교회는 인종의 차별을 극복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하는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신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어떻게 이름만 보고서 당시의 신분이 자유인인지 노예인지를 알 수 있을까요? 당시 헬라어나 로마 이름 중에는 노예 이름으로 고정화된 것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오네시모’입니다. 그는 바울이 옥중에서 복음으로 나은 자입니다. ‘오네시모’는 원어로 ‘쓸만한 놈, 유익한’이란 뜻으로 가장 흔한 노예 이름이었습니다. 본문에서 8절의 암블리아, 12절의 드루배나, 드르보사, 버시, 15절의 네레오 등이 노예 이름입니다. 그리고 5절의 마리아, 7절의 유니아, 15절의 율리아 등은 해방된 노예이거나 해방된 노예의 후손으로 간주됩니다. 반면에 브리스가, 아굴라, 우르바노, 루포 등은 자유인이었습니다. 당시 노예는 로마법적으로 인간이 아니라 물품처럼 거래의 대상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조차도 노예를 ‘생명 있는 도구’ 혹은 ‘움직이는 물건’이라고 불렀습니다. 로마원로원 의원이었던 세군투스에게 한 지붕 밑에 살던 200명의 노예가 있었는데 세군투스가 피살되자, 200명의 노예들이 주인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다 처형시켰습니다. 당시 노예가 어떤 대접을 받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로마교회는 노예와 자유인의 차별을 철폐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양반과 상인 사이의 차별의 벽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사회적 신분의 벽을 헐고 그리스도 안에 한 가족이 되어 있었습니다.
    셋째, 성별을 살펴보겠습니다. 로마교회는 남성과 여성이 혼재된 공동체였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27명 중 3절의 브리스가, 5절의 마리아, 7절의 유니아, 12절의 드루배나와 드루보사, 버시, 15절의 율리아, 네레오 등은 여성입니다. 혹자는 ‘유니아’는 남성일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로마교회는 여성과 남성이 함께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당시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인구를 계수할 때 여성을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여성은 남성의 종속적 존재였습니다. 여성의 인권이 인정을 받은 것은 20세기에 들어선 후입니다. 미국에서 여성이 참정권을 얻게 된 때가 1920년, 민주주의가 발전된 영국에서 여성이 투표권을 얻었던 때가 1928년, 프랑스는 1944년, 우리나라는 1948년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여성들이 참정권을 얻게 된 것은 아직 100년도 안 됩니다. 우리나라 초기에 교회당을 건축할 때 여성과 남성이 서로 볼 수 없도록 ‘ㄱ자’ 모형의 건물을 지었습니다. 후에는 직사각형 교회당에서 분리의 벽을, 후에는 휘장을 쳐서 구분했습니다. 그러니 당시 1세기 당시에는 얼마나 남녀 차별이 심했겠습니까? 우리는 우주여행을 하는 최첨단 과학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은 인권 자체가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로마교회는 남녀 간의 차별과 구분이 철폐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로마서 16장 3-16절을 통해 1세기 당시 로마교회를 어떤 공동체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즉 로마교회는 인종과 사회적 신분과 성별의 차이를 극복한 공동체였습니다. 사실 인종, 신분, 성별의 문제는 인간이 모이는 곳에는 항상 있었습니다. 즉 인종, 신분, 성별의 문제는 곧 인류의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로마교회가 인종과 신분과 성별 차이를 극복하고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던 원인이 무엇일까요? 저의 평소 지론은 “모든 문제의 답은 성경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으로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없습니다. 이번에 집필한 ‘신을 품다’는 고난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에 대한 답을 모두 성경에서 찾았습니다.
    로마교회가 이전까지 지구촌에 존재하지 않았던 멋진 공동체를 만들 수 있었던 근원적인 원인도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2장 13-16절을 읽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본문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이 화평을 이루었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로마교회가 인종의 신분과 성별의 장벽을 부수고 하나의 공동체를 만든 것은,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유대인과 이방인, 노예와 자유인, 남성과 여성의 벽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자체적으로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었습니다. 귀족들의 탐욕과 성적 타락은 극에 달했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인종과 신분과 성별의 차별이 사회문제의 정점에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으로 말미암아 로마제국 안에 전혀 새로운 공동체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저는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만일 ‘D3전도중심제자훈련’을 온 세상에 보급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라는 사명을 받지 않았다면 로마교회가 인종과 신분과 성별의 문제를 해결한 것을 심층적으로 연구하여 교회뿐 아니라 사회를 개혁하는데 앞장섰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교회를 이 세상과 전혀 다른 공동체로 만들 수 있을까요? 다시 갈라디아서 3장 26-28절을 읽습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세 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은 신분이 같다는 것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차별을 하겠습니까? 더군다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각자의 선행이 아니라 동일한 믿음, 즉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음으로 되었기 때문에 차별은 있을 수 없습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세례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서로 연합되었는데 어찌 차별이 있을 수 있습니까? 또한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옷은 사람의 신분을 표시합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기에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셋째로, 우리가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하나라는 것은 인종과 신분과 성별에 관계 없이 다 같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이런 사실을 모르는 자가 누가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는 것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알기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지를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어떻게 우리의 생각을 행동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반드시 의식화를 해야 합니다. 바울이 로마서 6장 11절에서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여기다’는 말은 의식화하라는 뜻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다는 것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알고만 있고 의식화를 해야 하지 않기에 교회가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보이는 것으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입고 있는 옷, 타는 차, 사는 집을 보고 평가합니다. 젊은이들이 월세와 전세를 살아도 외제 차를 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잠실에서 부교역자로 사역할 때였습니다. 부흥강사가 오면 주로 숙소를 롯데호텔로 잡았는데 제가 담임목사님의 차로 모시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평소 제 차로 호텔 정문으로 가면 아무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담임목사님의 차로 가면 안내원이 황급히 달려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제 차는 소형차 ‘액센트’였고, 담임목사님의 차는 당시 가장 비싼 ‘아카디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눈에 보이는 것들로 사람을 구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다름이 있을 뿐 차별은 없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하는데, 자신이 상대방보다 더 좋은 직장에 다닌다거나, 더 돈을 많이 번다거나, 헌금을 더 많이 낸다는 이유로 자신이 더 낫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생각만이 주께로부터 온 생각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더처치가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함께 노력하여 주님께서 찾으시는 바로 그 교회를 만드는 일에 주인공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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