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로마에 입성하다 행 28 :11-22 2020.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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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로마에 입성하다 행 28 :11-22 2020. 9. 272020-09-27T10:51:32+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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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사도행전 28장 1-10절을 통해서 몇 가지 주의 교훈을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간단히 살피고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하여 주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첫째로, 멜리데 사람들이 구조된 사람들의 신분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영접한 것을 통하여 무엇을 교훈 받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혹 자신도 모르게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고 있지 아니한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외모도 대하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도 외모로 차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누가가 뱀을 3절에서는 독사라고 했다가 4-5절에서는 짐승이라고 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바울이 짐승을 불에 떨어버린 것은 장차 예수께서 짐승을 유황불 못에 던지실 것을 예표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승리를 확정하고 마귀와 싸우므로 마귀의 공격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유라굴로 광풍을 잠재워서 배를 파선하게 하시지 않았는데 멜리데 섬에서는 기적을 행하여 그곳을 복음화하게 하신 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멜리데 섬을 복음화할 계획을 갖고 바다에서 유라굴로 광풍을 허락하신 것처럼 의도를 갖고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고난을 당해도 낙심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넷째로, 누가가 왜 보블리오가 바울 전도팀을 융숭히 대접하고 배에 쓸 것까지 실었다고 기록했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단지 보블리오가 부친의 병을 고침받고 감사해서 바울의 일행을 후하게 대접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방법으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일행이 멜리데 섬에서 3개월이 지난 후 항해가 가능하게 되자 그곳을 떠나게 됩니다. 그들이 그곳에서 탄 배가 무슨 배라고 소개하고 있습니까? 11을 다시 읽습니다. “석 달 후에 우리가 그 섬에서 겨울을 난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떠나니 그 배의 머리 장식은 디오스구로라.” ‘알렉산드리아 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의 일행이 무라 시에서 탄 배도 알렉산드리아 배였습니다(행 27장 6절). 그래서 이 배에 대하여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하나는, 유라굴로 광풍으로 파선한 배가 고물만 파손되었기에(행 27:41) 멜리데 섬에서 머무는 3개월 동안 수리해서 출항이 가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항해 중 겨울을 만나 멜리데 섬에 잠시 정박한 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 일행이 무라 시에서 탔던 배는 머리 장식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멜리데에서 탄 배는 머리 장식이 ‘디오스구로’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다른 배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참고로 ‘디오수구로’는 당시 선원들이 수호신으로 여기던 제우스의 쌍둥이 아들 카스토르(Castor)와 폴룩스(Pollux)를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앞에서 보블리오가 초청하여 융숭한 대접을 한 ‘우리’가 어떤 자들인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멜리데 섬에서 구조를 받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 바울의 일행만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11절의 ‘우리’는 어떤 자들일까요? 276명이냐, 바울의 일행만을 가리키냐는 것입니다. 언 듯 보면 바울의 일행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결박을 당한 채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도착한 것으로 보아 백부장을 비롯한 군인들과 다른 사람들도 함께 승선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276명이 모두 타려면 그 배가 보통 큰 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당시 멜디데 섬에 정박하던 배는 아주 큰 배든지 빈 배든지 둘 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 배가 상당히 큰 배든지 빈 배였든지 멜리데 섬에 그런 배가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께서 바울이 로마 황제에게 복음을 전하러 갈 수 있도록 미리 큰 배를 그곳에 준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입니다. 여러분의 인생도, 우리의 D3사역도 다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들이 수라구사에 대고 사흘을 있다가, 거기서 둘러가서 레기온에 이르러 하루를 지낸 후 남풍이 일어나므로 이튿날 보디올에 이르렀다고 말씀합니다(12-13절). ‘수라구사’는 시라큐스(Syracuse)로서 오늘날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에 있는 항구도시입니다. 그곳에서 정박하여 사흘을 머물다가, 건너편에 있는 레기온으로 갑니다. 지금은 ‘레지오 칼라브리아’(Reggio Calabria) 항구라고 하는데 이탈리아 반도의 엄지발가락에 해당하는 곳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하루 정박했습니다. 남풍이 드디어 불어오자 다음 날 항해하여 하루 만에 ‘보디올’(Puteoli)에 도착합니다. 보디올은 현재 나폴리의 서쪽에 있는 포쭈올리(Pozzuoli) 항구입니다.

    그들이 보디올에 도착하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14입니다. 거기서 형제들을 만나 그들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머무니라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라.” 바울은 보디올에서(지금의 나폴리)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만나서 대화를 하고 헤어진 것이 아니라 그곳 형제의 초청을 받아 그들과 함께 이레를 함께 머물었습니다. 바울이 보디올에서 형제들과 일주일간 함께 머무는 동안 무엇을 했을까요? 아마도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후 제자들과 며칠 동안 함께 있을 때 훈련을 받았던 것처럼 그들을 훈련했을 것입니다. 지난 번에 두로에서도 며칠 동안 있을 때도 이렇게 했을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누가가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라라고 말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다른 번역본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그런 다음에 드디어 우리는 로마로 갔다.”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이 예루살렘 공회에서 복음을 전하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분쟁이 있었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바울에게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어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23:11)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누가가 바울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대로 로마에 들어갔다고 기록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우리는 이와 같이 로마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바울 혼자서 로마에 갔다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함께 로마에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누가는 사도 바울을 영웅으로 묘사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계 복음화는 한두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공동체가 함께 하는 것입니다. 마치 몸의 모든 지체가 다 중요하듯이 교회에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한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나이가 많다고, 헌금을 많이 드리지 못한다고, 특별한 재능이 없다고, 교회에서 소중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무관심하면 안 됩니다. 교회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 운명공동체입니다. 특별한 사람만 주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주의 일에 동참하지 않게 되고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영웅으로 만들어진 자는 교만하게 되어 패망에 이르게 됩니다. 더치치는 한두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하는 공동체로 나아가야 합니다.

    드디어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15입니다. 그곳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성령께서 바울에게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23:11)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바울이 로마에 복음을 전한 첫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로마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바울이 로마에 가기 전에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로마서 1장 8절을 읽습니다.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당시 이방 세속 문화의 상징인 로마에도 교회가 있었고 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정도였습니다. 당시 로마에 어느 정도로 복음이 전파되었는지는 로마서 16장을 보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교회에 문안 인사를 하면서 많은 사람의 이름을 열거합니다. 29명이나 등장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자가 있습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입니다. 로마서 163을 읽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또 5절을 보면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라고 합니다. 바울은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부부와 그들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라고 합니다. 이를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가 로마에서 가정교회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들 부부를 언제, 어디서 만났습니까?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에 고린도에서 만났습니다. 그들이 고린도로 온 것은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가 유대인을 로마에서 떠나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그들의 생업이 같았기 때문에 함께 살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제자훈련을 해서 사역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로마로 돌아갈 기회를 얻어 그곳에서 가정교회를 개척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디까지 바울을 마중 나왔다고 말씀합니까? 15절에서 알 수 있듯이 압비오 광장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마중을 나왔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마중을 나온 그룹은 둘입니다. 하나는 로마로부터 남쪽으로 약 64km(40마일) 이상 떨어져 있는 ‘압비오(아피아) 광장’까지 나온 자들이고, 또 한 그룹은 로마에서 48km(30마일) 이상 떨어진 ‘트레이스 타베르네’, 즉 아피아 가도(Via Appia) 상의 요지인 ‘Three Taverns’(세 개의 여관)까지 나온 자들입니다. 바울은 믿음의 형제들이 로마에서 압비오 광장과 타베르네까지 마중을 나올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뜻밖에 마중을 나온 형제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담대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께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감사할 조건과 담대함을 얻게 하십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감사와 담대함을 불러온 로마교회의 형제들의 마중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이 64km와 48km나 되는 곳에서 바울을 마중하러 왔다는 것은 시간과 돈과 육체의 고통을 요구합니다. 즉 그들이 바울을 마중하러 왔다는 것은 희생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희생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거나 담대함을 갖게 할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희생에 감동을 받듯이 우리도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려면 기꺼이 희생을 지불해야 합니다.

    바울이 로마에 오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16을 보십시오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바울은 로마에 도착하자 감옥에 갇히지 않고 그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가 이렇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울이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흘 후에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자신을 변명하고 복음을 전합니다. 17-19입니다.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이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으니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바울은 자신의 초청을 받아 온 유대인 고위층들에게 그가 로마에 온 것은 유대인을 고소하기 위한 온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왜 바울이 그들을 초청해서 이런 말을 했을까요? 그들이 바울을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바울이 이렇게 한 것은 자신을 적극적으로 변명한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한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아신다고 가만히 있지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해서 자신을 변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쓸데없는 오해를 막을 수 있고 복음을 전하는 데 방해를 받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가 죄를 짓지 않았는데 쇠사슬에 매이게 된 이유를 밝힙니다. 20절입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바 되었노라고 합니다. 지난번 강해 때, ‘이스라엘의 소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이는 죽은 자의 부활을 뜻합니다(행 23:6). 즉 자신이 쇠사슬에 매여 로마에 죄수의 신분으로 온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주장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율법에 매여 있었지만 주님을 만난 후에는 복음 때문에 쇠사슬에 매였습니다. 그가 율법에 매였을 때는 사람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지만 복음에 매이자 생명을 살리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무언가에 매어 삽니다. 하나라도 매이지 아니한 사람은 없습니다. 자식에게 매이든지, 돈에 매이든지, 직장에 매이든지, 공부에 매이든지 무언가에 매여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도 바울처럼 예수님 때문에 쇠사슬에 매인바 되어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 매인 삶만이 진정으로 복된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울의 말을 듣자 어떻게 했습니까? 21-22입니다.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전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기 때문이라 하더라.” 로마의 유대인들은 바울에 대한 어떤 부정적인 말을 들은 적이 없다고 밝힙니다. 그러면서 왜 그리스도인들이 어디 가나 반대를 받는지 알고 싶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핍박했습니다. 그런데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을 핍박하지 않고 그의 말을 들어보려는 열린 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이전에 복음에 부정적으로 생각하던 사람이라도 포기하지 말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에 있는 유대인이 이렇게 오픈 마인드를 가진 것을 알게 된 것은 자신을 늘 핍박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했어도 그들을 초청하여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상대방이 복음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 아예 포기하지는 않습니까? 지금껏 부정적으로 생각한 자들이라고 마음의 문을 닫지 말고 바울처럼 새롭게 시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바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바뀌듯이 상대방의 생각도 바뀝니다. 주님께서 복음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사람들에게 다시 복음을 전하는 은혜를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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