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향한 원망이 들리나요? 느5:1-19 201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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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향한 원망이 들리나요? 느5:1-19 2014.6.82018-12-03T21:21:38+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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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지난 번 강해에서 느헤미야가 이스라엘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성벽을 재건하면서 밖으로부터 많은 반대와 압력을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느헤미야는 공격하는 대적들과 직접 다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심판자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공격하는 자와 직접 싸우지 말고 주님께 엎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만 하지 말고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공동체의 내부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유다 공동체의 내부에 언제 문제가 발생했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1절은 그 때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때란 느헤미야와 유대인들이 산발랏과 도비야 등으로부터 조롱과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성벽 재건공사에 온갖 힘을 기울이고 있었을 때입니다. 그들은 대적들이 언제 공격을 받을지 몰라 24시간 돌아가면서 파수하고 한 손엔 병기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론 노역을 하며 밤낮으로 옷을 벗지 않고 불철주야 성벽재건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뜻하지 않게 내부적으로 갈등이 빚어져서 공동체 분열의 조짐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시험은 멈추지 않고 계속 된다는 것입니다. 시험은 밖으로부터만 불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부에서도 일어납니다. 즉 시험은 안팎으로 계속되는 것입니다. 왜 이토록 시험이 안팎으로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기 때문입니다(벧전 5:8). 사자가 언제 우는지 아십니까? 배고플 때만 웁니다. 마찬가지로 마귀가 우리를 공격한다는 것은 배고프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언제 배고픈지 아십니까? 항상 배고픕니다. 그래서 마귀의 시험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마귀가 이토록 우리를 계속해서 공격하는지 아십니끼? 그것은 자기 자녀를 하나님께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 마귀의 자녀였습니다(8:44). 그런데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1:12). 그러니 어찌 마귀가 자녀를 빼앗기고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마귀는 제 아무리 공격해도 우리를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가 우리를 계속해서 공격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하여 법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실제적으로는 마귀의 자녀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신분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실제로는 마귀의 자녀로 살아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처음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마치 맛을 잃은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마귀가 바로 이것을 노리고 계속해서 우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권투경기를 통하여 마귀가 우리를 어떻게 공격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권투경기를 보신 분은 다 아시겠지만 상대방을 공격할 기회를 계속 찾습니다. 그러다가 틈만 보이면 즉시 펀치를 날립니다. 그리고 날린 펀치에 움찔하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또 다시 공격합니다. 마찬가지로 마귀는 이렇게 우리를 공격을 합니다. 한 번 공격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상대방이 쓰러질 때까지 계속해서 공격합니다. 약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격합니다. 마귀는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서 왔기 때문에 우리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무자비하게 공격합니다. 우리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계속 어려움을 당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계속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면 그 배후에 마귀의 공격 전략이 있음을 알고 마귀와 영적전쟁을 해서 승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유다공동체에 불어 닥친 시험은 무엇이었습니까? 다시 1절을 읽어보시겠습니다. 그 때에 백성들이 그들의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들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을 원망하는데여기서 우리는 백성들의 원망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형제인 유다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같은 형제인 유다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자들일까요? 7절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귀인과 민장들입니다. 그런데 왜 백성들이 그들을 행해 원망을 쏟아냈습니까?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2-5절을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가고 남은 자들이기 때문에 넉넉한 생활을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흉년까지 들자 생활형편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먹고 살기 위해 귀인과 민장들에게 고리로 빚을 내었습니다. 처음에는 밭과 포도원을 담보로 돈을 빌렸지만 나중에 그것조차 갚을 수 없게 되자 자식을 종으로 팔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귀인과 민장들을 향해 원망을 쏟아붓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통하여 유대민족끼리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신명기 157-9절을 읽어보시겠습니다(286P).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 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이 말씀은 동족 중에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도움을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가나한 자를 도와주지 않으면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같은 동족끼리는 어려울 때 서로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귀인과 민장은 돕기는커녕 오히려 고리로 돈을 빌려주고 갚지 못할 경우 저당 잡힌 포도원과 땅을 가로채고 자식들까지 데려다가 종으로 삼았습니다. 한 마디로 당시 귀인과 민장들은 그들의 배만 불리고 있었고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이행하지 않아 원망의 대상이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서로에게 의무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상대방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 서로 도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왜 가정에서 부모가 자식을 부양하고 또 자식은 늙은 부모를 부양합니까? 서로에게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혈육의 피로 가족이 된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가족이 된 것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혈육으로 맺은 가족관계는 일시적이지만 예수의 피로 맺은 가족은 영원합니다. 이 세상에서 맺어진 혈육관계는 기껏해야 100년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부자관계라 해도 그 관계를 100년 이상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피로 맺은 가족 관계는 영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안에서 형제자매가 된 자들의 가난에 책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6:10)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같은 형제자매가 된 자들에게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조금이라도 책임을 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교우들로부터 인색하다는 말을 듣지 말고 관대하다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자신의 인색함 때문에 피 값으로 사신 형제자매가 피눈물을 흘리고 있지는 아니한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결코 자신의 배만 채우고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음으로 교우들로부터 원망의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원망과 관련하여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스라엘백성들이 광야에서 원망을 하다가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전 10:10)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또 야고보 사도는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5:9)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우리가 원망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동족에게 원망을 했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원망의 대상인 귀족과 민장들이 느헤미야에게 책망을 들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원망하는 본인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경우가 있고, 원망하는 대상이 심판을 받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원망이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공동체 안에서 들리는 원망을 모두 동일한 원망으로 취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동안 교회 안에서 들리는 원망에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둘을 구분하지 않고 원망하면 무조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입단속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이제 공동체 안에서 들리는 원망을 분석해야 합니다. 먼저 믿은 저와 여러분의 잘못 때문에 들리는 원망이라면 잘못을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믿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라면 감사훈련을 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이제 느헤미야가 공동체 안에 발생한 내부문제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백성들의 고통에 즉시 동참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부르짖음과 원망을 듣고서 지금은 성벽 재건공사로 바쁘니 나중에 얘기합시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원망을 듣자마자 크게 노하였습니다. 그가 백성들의 말을 듣자마자 크게 노하였다는 것은 백성들의 고통에 즉시 동참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백성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그들의 원망을 듣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진정한 지도자는 국민들의 고통과 함께 하는 자입니다. 함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우리는 부시 대통령이 911 테러로 재터미로 변해버린 뉴욕의 그라운드 제로의 현장에서 어느 소방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손확성기를 들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I can hear you, the world can hear you.” 무슨 말입니까? 지금의 상황에서 미국시민들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들린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의 고통에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자 국민의 지지를 한 몸에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 왜 유가족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에 미흡하다는 반응을 보였습니까? 박대통령이 유가족들의 고통에 진심으로 함께 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우리는 서로 지체이기 때문에 서로의 고통을 느껴야 합니다. 우리는 성도 간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너무 두껍게 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지체가 어떤 어려움으로 고통을 당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서로의 아픔을 함께 하는 공동체가 되면 교회에 어떤 시험이 닥쳐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12:15-16). 이제 우리는 교회 내부에서 원망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상대방의 고통에 동참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둘째로, 원망을 신중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원망을 듣고 크게 노했지만 그 분노를 즉각 말과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행동하기 전 깊이 생각했습니다. ‘깊이 생각했다는 말은 거룩한 분노를 폭발시키지 않고 그 분노를 어떻게 처리할지를 주님께 물었다는 것입니다. 분노하는 것과 그 분노를 말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별개의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도 그 분노를 상대방에게 말이나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주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혼자서 분노하는 것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인도를 받지 않고 자신의 감정대로 상대방에게 분노를 표출하면 상처를 입히고 공동체를 파괴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건물을 짓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고 수고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너뜨리는 것은 순간입니다. 마찬가지로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면 자신이 쌓아온 신앙의 덕을 한 순간에 무너뜨리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분노를 밖으로 말과 행동으로 표출하기 전에 깊이 생각하고 주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표출하고 싶은 분노를 통제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모세를 통하여 감정을 통제하는 법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모세는 애굽 사람이 자기 동족을 죽이는 일을 목격하고 분노가 일어나자 그 분노를 참지 못하고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80세에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을 때는 그런 감정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세를 가리켜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12: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모세가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광야 40년간 자신을 죽이는 훈련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광야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을 날마다 죽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사도 바울은 혈기가 충만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겸손하고 온유한 자가 될 수 있었습니까? 그의 고백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단지 하나님을 믿는 것만 훈련하지 말고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는 것도 훈련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될까요? 분노를 표출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때마다 이미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을 시인했습니다. 그것을 실제로 믿고 날마다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성경은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16:32)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노하고 싶은 상황에서 자신을 통제함으로 성을 빼앗은 장수보다 더 나은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  째로, 그들의 잘못을 변명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원망을 듣고 대회를 열어 공개적으로 귀족과 민장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낱낱이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백성들의 원망을 듣자마다 대회를 열어서 그들을 책망한 것이 아닙니다. 7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깊이 생각하고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높은 이자를 취하는도다 하고 대회를 열고 그들을 쳐서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느헤미야가 대회를 열어 공개적으로 그들의 잘못을 책망하기 전, 먼저 귀족과 민장을 불러 그들의 잘못을 책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말하기 전에 먼저 그 사람에게 잘못을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할까요? 잘못한 자도 역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일뿐 아니라, 잘못을 돌이키고 회개하면 다시 주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쓰임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가 문제를 일으킨 경우는 곧바로 정죄하고 심판하지 말고 상대방이 변명하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두 가지 극단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는 잘못을 해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습니다. 과연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일까요? 아닙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에 잘못하고 있다면 바로 잡아주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혐의가 있는 자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죄인 취급을 합니다. 세상 법정도 피고가 변론할 기회를 줍니다. 그러나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무엇을 잘못했는지에 대한 조사도 없이 일방적으로 재단할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떠돌아다니는 한 쪽 말만 듣고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말하거나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잘못을 범한 형제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18:15-17). 만일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여 상대방이 그 말을 들으면 거기서 그 문제를 끝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만일 권면을 듣지 않으면 두세 증인을 세워 확증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말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삶으로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느헤미야가 귀족들과 민장들을 책망하자 그들은 느헤미야의 말에 순종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느헤미야의 말에 순종한 것은 원망의 원인이 제거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내부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실 귀족들과 민장들이 느헤미야의 말에 즉각적으로 순종한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끊기 어려운 욕심중의 하나가 재물 욕입니다. 그래서 동족 간에도 고리대금을 통하여 자신의 배만 불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느헤미야의 책망을 듣고 즉각적으로 돌이킬 수 있었을까요? 느헤미야의 설득력이 탁월했기 때문일까요? 혹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그들의 마음을 바꿔놓으셨기 때문일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느헤미야의 삶이 그들과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총독이었지만 녹을 받지 않았습니다. 12년간을 총독으로 재임하면서 한 푼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와 함께 식사한 자들이 유대인 민장 150명과 이방인들이 있었지만 그 모든 경비를 자신이 부담하였습니다. 느헤미야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닥사스다 왕의 후원을 받아 성벽재건을 하므로 경제적으로 넉넉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경제적으로 넉넉하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99개 가진 사람이 하나를 빼앗아 100개를 가지려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가 이전 총독과 다르게 백성들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돈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예배를 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서야 할 것을 알고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전의식을 갖고 살아갈 때에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요한이 유대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외칠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세례요한의 말에 순종했던 것은 그가 당시 다른 제사장들과 다르게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제사장들은 성전 안에서 편하게 호의호식하고 있었지만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말로만 가르치면 안 됩니다. 먼저 믿는 사람들이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목회자로부터 중직자들이 먼저 말씀대로 살고 본을 보일 때에 내부 갈등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느헤미야가 새롭게 불어 닥친 내부갈등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원망이 지도자들의 잘못에 있음을 알고 그들을 책망하였습니다. 우리도 혹 교회의 내부갈등이 먼저 믿은 우리에게 있지 아니한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인색함과 교만으로 성도들이 주안에서 하나 되지 못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성경적인 방법으로 내부문제가 해결되어짐으로 지금보다 더욱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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