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겐 '그 이튿날'이 있습니까? 느 8:1-18 2014.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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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겐 '그 이튿날'이 있습니까? 느 8:1-18 2014.6.292018-12-03T21:50:39+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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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느헤미야서 7장을 통하여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첫째로, 의식주보다는 먼저 하나님의 통치를 구하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구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둘째로,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최고로 경외하는 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셋째로, 하루를 시작하기 전 충분히 주님과 교제해야 세상에 나가 비그리스도인과 다른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넷째로, 사소한 문제로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고 성경을 불신하거나 시험에 들어 주님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섯째로, 주님께 대한 사랑을 멈추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기 때문에 첫 사랑을 회복하여 지속적으로 주님께 헌신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 주간 어떻게 사셨습니까? 주님의 음성에 조금이라도 순종하시기 위해 노력하셨습니까?

       우리가 지난주에 읽어서 알고 있듯이 이스라엘백성들은 성벽재건 후 각각 그들이 과거에 살았던 곳으로 가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이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을 강론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을 강론해 달라고 부탁한 때가 언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1). 이스라엘백성들이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을 강론해 달라고 한 때가 일곱째 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이스라엘백성들이 하필이면 일곱째 달에 이르러 에스라에게 나아가 모세의 율법을 가르쳐달라고 했을까요? 일곱째 달에는 유대인들의 나팔절‘(23:23-25) 절기가 들어 있습니다. 나팔절은 속죄일의 준비로 나팔을 불어 성회를 열어 거룩하게 지키는 날입니다. 그러나 일곱째 달은 민간력으로 새해 첫 째 달로서 새해를 기념하는 달이기도 합니다. 새해 첫날은 남다른 각오를 합니다.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믿는 사람은 믿음으로 살 것을 결단하고 각오를 합니다. 즉 이스라엘백성들이 일곱째 달에 에스라에게 율법을 강론해 달라고 한 것은 새해를 믿음으로 살겠다는 각오를 보여준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악조건 속에서 성벽을 수축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좀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새해 첫날부터 편안한 삶을 선택하지 않고 믿음으로 살기 원하여 수문 앞 광장에 모여 모세의 율법을 듣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살겠다는 각오를 날마다 해야 합니다. 이보다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결단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성벽재건을 완공한 후에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을 강론해 달라고 한 때는 성벽재건 공사를 다 마치고 각각 그들의 성읍에서 살아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들이 그런 상황에서 에스라에게 말씀을 가르쳐 달라고 한 것은 사람의 행복은 외적으로 든든하게 쌓은 성벽에 있지 않고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소유와 신분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부자들과 권세를 가진 자들이 더 행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는 부탄입니다. 인구가 70만 명밖에 안 되고 국민소득은 일인당 65백 불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솔로몬을 통해서도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인간으로서는 최고의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고백한 말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리고 그가 전도서에서 마지막으로 한 말이 무엇입니까?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12:3). 그렇습니다. 인간은 소유와 신분만으로 행복해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마귀의 시험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오 하나님, 내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얻을 때까지 나의 인생에는 진정한 휴식이 없었습니다.”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온통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우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말씀으로 채우지 않으면 마음의 평안도 참 기쁨도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백성들이 수문앞 광장에 모여서 어떻게 했습니까? 2-3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그들은 수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수문 앞 광장은 성전 동문과 성벽 사이의 공터를 말하는데 여기서 사람들이 물을 길어다 먹고 있었기 때문에 서민들의 출입이 잦았습니다. 그런데 에스라가 그곳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율법책을 읽을 때에 그들이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여기서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는 말이 아닙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는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예배를 드리는 태도를 보면 압니다. 배고픈 사람은 음식이 나오기 전에 식탁에 앉습니다. 그리고 음식이 다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이것저것을 주어먹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한다면 예배시간 전에 참석합니다. 그리고 찬양을 드리는 순간부터 마음이 뜨겁습니다. 그리고 설교 말씀에 집중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거의 절반가량이 예배 시간을 넘어서야 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 전 찬송이 뜨겁지 않습니다. 찬송을 드려도 형식적으로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도 낙서를 하고 스마트폰을 보고 심지어 어떤 분은 깊은 잠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하게 하시고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은혜의 수단이기 때문에 말씀을 사모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돈을 사모하면 불행이 찾아오지만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면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통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영혼의 문제, 마음의 문제, 육신의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결 받지 못할 인생의 문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설교자가 엄청난 시간을 드려서 말씀을 준비하듯이 말씀을 듣는 청중도 말씀을 잘 듣기 위해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의 홍수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아무 때나 어디서나 유명한 목회자의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어디서나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역사 이래 지금처럼 말씀의 홍수 속에 산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그 어느 때보다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주님은 사랑하는 마음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랑보다는 이 세상을 사랑하는 음녀가 되었기 때문에 말씀을 사모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119:131). 욥은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23:12)라고 고백했습니다. 욥이 하루 세끼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긴 것은 말씀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사모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은 영적으로 중병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그 병을 치유 받고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런데 에스라는 말씀을 혼자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7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은 백성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 그들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였는데예수아를 비롯한 13명의 사람들과 레위 사람들이 에스라의 말씀부흥운동에 함께 했습니다. 에스라가 강단에서 율법을 가르치는 동안 그들은 백성들 곁으로 다가가서 말씀을 잘 깨닫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에스라를 중심으로 일어난 말씀부흥운동은 큰 성공을 거둘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말씀부흥운동에 함께 할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백성들을 가르치기 전, 먼저 에스라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먼저 에스라에게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먼저 말씀을 배우고 그 배운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는 방법을 제자훈련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에 제자훈련을 하셨고 마지막으로 승천하시면서 가서 제자 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디모데를 제자로 삼고 그에게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우리도 제자훈련을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제자 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19-20)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제자가 있습니까?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말씀을 가르쳤는데 그가 또 다른 사람을 개인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명령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중에 최고의 명령은 가서 제자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명령을 지상명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명령에는 불순종할지라도 이 명령에는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다른 명령을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이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을 찾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예를 들어 십일조를 드리고 주일성수는 하려고 해도 제자 삼는 일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제자훈련의 대명사라고 하는 사랑의교회 성도들조차도 세상에 나가서 개인적으로 복음을 전해서 제자 삼는 그리스도인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제자 삼는 삶을 살아가도록 돕기 위해서 ‘D3왕의사역을 창안한 것입니다. 나이와 학력과 은사에 상관없이 누구든지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하고 제자 삼는 삶을 살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교회에도 그렇게 하라고 24명의 사역자를 세웠지만 삶속에서 복음을 전하고 제자 삼는 사역자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최고의 목회는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고 그를 말씀으로 양육하여 그가 또 다른 사람을 전도하고 말씀으로 양육하여 주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목회는 목회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훈련 받은 평신도가 하는 것입니다. 가방끈이 짧아도 나이가 들었어도 가르치는 은사가 없어도 훈련 받으면 누구든지 복음을 전하고 말씀으로 양육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에게 말씀을 가르쳐서 그들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고 그들이 행복한 삶을 살게 하는 일에 쓰임을 받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백성들이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서 말씀을 깨닫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8-9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말씀을 깨달은 자들이 울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울었을까요? 설교자가 슬픈 이야기를 해서 울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동안 말씀대로 살지 않은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즉 회개의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눈물은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회개의 눈물은 가장 아름답고 복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이켜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회개가 없이 주님의 위로와 축복을 받는 것은 오히려 화를 불러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잘못을 깨우쳐주는 말씀보다는 위로의 말씀, 축복의 말씀을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회개가 살 길인데 회개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세상적인 복을 받기만 원합니다. 이제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나의 잘못을 깨닫게 하소서.” 그러나 백성들은 말씀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으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이튿 날’,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더 알기 위해 에스라에게 모였습니다. 그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들이 일 년에 한 번은 반드시 초막절을 지켜야 하는데 그 명령에 불순종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즉시 나뭇가지를 취하여 혹은 지붕 위에, 혹은 하나님의 전 뜰에 혹은 수문 광장에 혹은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짓고 그 곳에서 일주일간 살았습니다. 한 마디로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여기서는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왜 이스라엘백성들은 말씀을 깨닫고 즉시 순종하였는데 우리는 수없이 말씀을 들어도 말씀에 순종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는 이튿 날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튿날이 없다는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말씀을 깨닫기만 하지 그 후로 그 말씀과 관련하여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백성들이 초막절 절기를 지키라는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회개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이튿날에스라에게 찾아가서 말씀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지만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그 이튿날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말씀으로 은혜를 받고 잘못을 깨달아도 그 이튿 날이 없으면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말씀대로 살고 싶다면 말씀의 은혜를 받는데서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깨달은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씨름해야 합니다.

       말씀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기록된 말씀을 로고스라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말씀을 듣거나 읽을 때에 우리의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이 있는데 이를 레마라고 합니다. 그러나 로고스말씀은 우리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와 닿은 레마말씀만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접하는 단계로는 5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듣기, 둘째로, 일기, 셋째로 연구, 넷째로 암송, 다섯째로 묵상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단계인 묵상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말씀대로 살 수 없습니다. 말씀을 묵상해야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여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은 누가 지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지배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생각이 지배하고 있습니까? 말씀이 마음을 지배할 때까지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자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23:2). 그렇습니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할 때에 말씀대로 살게 되기 때문에 진짜 복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베뢰아 지역이 데살로니가 지역보다 구원 받는 자들이 많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17:11-12). 베뢰아 사람들은 단 한 번 말씀을 듣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날마다성경을 상고했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믿고 구원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삶을 변화시키는 왕도는 없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매일 묵상해야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말씀을 깨닫고 순종하자 그들의 마음이 어떠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17절을 읽겠습니다.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중이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한 일이 없었으므로 이에 크게 기뻐하며 본문은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초막을 짓고 그 안에 거했다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들이 자기 집을 나가서 초막을 짓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집을 떠나 초막에 7일간이나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불편한 것이 하나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7일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그들의 마음이 어떠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크게 기뻐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크게 기뻐하였다는 말은 더할 나위 없이 기쁨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완벽한 기쁨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말씀에 순종하면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말씀의 순종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순종이 없는 기쁨은 없습니다. 사도행전 18절은 오직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1:8)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교회는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오직 예루살렘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큰 핍박을 통하여 그들을 다 흩어버리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흩어져서 사마리아 성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자 그 성에 큰 기쁨이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8:8). 순종은 기쁨을 낳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면 좋을 것 같지만 결국은 고통이 찾아오고 환난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하면 잠시 동안은 고통이 있지만 나중에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기쁨과 순종은 비례합니다. 큰 순종에는 큰 기쁨이 작은 순종에는 작은 기쁨이 따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에스라가 말씀부흥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말씀운동에 함께 할 자들이 있었고, 또 말씀을 들은 자들이 깨닫는데서 멈추지 않고 좀 더 알고자 노력하는 그 이튿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말씀훈련을 받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깨달은 말씀을 묵상하므로 말씀대로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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