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요1:29-36 2013.9.1

//당신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요1:29-36 2013.9.1
당신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요1:29-36 2013.9.12018-12-03T20:38:5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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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생활이란 한 마디로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어떤 분인가를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아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평생 같이 살아도 잘 모르는데 하물며 어떻게 하나님을 정확히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제자들마저도 3년을 좇아 다녔지만 정확히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사촌지간인데 오늘 본문을 보면 두 번이나 예수께서 그리스도인지를 알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만 그분이 정확히 어떤 분이신지를 모르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가룟 유다 같이 됩니다. 가룟 유다는 3년간을 좇아다녔지만 예수님을 랍비로만 알았기 때문에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를 믿다가 시험에 들어 신앙생활을 그만 두거나 타종교로 옮겨갑니까? 예수님이 정말 누구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히 알고 그분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고백한 것에 대해서만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어린양은 구약성경에서 창세기 4장에 제일 먼저 나옵니다. 가인과 아벨이 함께 제사를 드렸는데 예물이 각기 달랐습니다. 가인은 곡식 단을 드렸고, 아벨은 어린양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곡식 단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어린양은 받으셨습니다. 두 번째로는 출애굽기 12-13장에 나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40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이스라엘백성들을 구원하려고 하는데 애굽왕 바로가 순순히 놓아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맨 마지막 재앙은 애굽의 모든 장자를 죽이는 재앙이었습니다. 그 때에 살 수 있는 길이 단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어린양을 잡아서 피를 좌우설주와 문인방에 바르면 되는 것입니다. 즉 어린양의 희생으로 장자의 재앙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로는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의 제물로 나옵니다. 어린양은 5대 제사 중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를 제외한 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죄에 제물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드리는 상번제의 제물이 바로 어린양이었습니다(28:4). 왕이든, 서민이든, 제사장이든, 민족공동체이든 어린양의 희생 없이는 하나님께 나가지 못했습니다. 어린양은 항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 덮어 쓰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즉 어린양은 속죄 제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가 있을 때마다 항상 흠이 없고 점이 없는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뿌림으로써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죄를 지을 때마다 어린양을 잡아 피를 뿌리는 것은 번거로웠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많은 양을 죽여도 그들의 죄를 온전히 씻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친히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의 몸을 어린양의 대속 제물로 내어 주심으로 단 번에 우리의 모든 죄 문제를 영원히 해결해주신 것입니다(10:2,10). 따라서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기만 하면 단 번에 과거에 지은 죄, 현재 짓고 있는 죄, 미래에 지을 죄까지 다 사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만 했을까요? 우리가 어떤 일에 잘못을 하면 그 잘못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합니다. 예를 들면 현행 형법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면 형사처벌을 받아야 하고 민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손해배상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감옥에 갔다 오고 누군가에게 잘못한 것을 배상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우리의 죄가 완전히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혹 잘못해서 형사처벌을 받고 손해배상을 해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죄가 남아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를 통해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형제간에 크게 싸웠다고 합시다. 그러면 형제간에 다툰 것으로만 끝이 납니까? 아닙니다. 부모님과의 관계가 남아 있습니다. 원래 라는 것은 헬라어로 하마르티아라고 하는데 이 말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목표에서 벗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323절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근본적으로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잘못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지 사람과의 관계에서 잘못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과의 관계가 아무리 좋아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면 모두 죄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된 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지 않으면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잘못한 죄는 어떻게 해결 받을 수 있을까요? 종전에 살펴본 대로 사람과의 관계에서 잘못한 것은 배상을 해주거나 형사처벌을 받으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잘못한 것은 한 가지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인류의 조상 아담과 그렇게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그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시면서 만일 그것을 먹으면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그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말씀대로 죽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다’(6:13)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죄를 범하면 죽어야하고 죽은 후에는 심판받아 영원히 지옥에 가야 합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이런 운명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인이신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53:5).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허물과 죄악으로 찔리시고 상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와 허물 때문에 창에 찔리시고, 징계를 받으시고, 무서운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속죄제물의 종류가 많은데 왜 예수님을 어린양이라고 했을까요? 우리가 알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 용서를 받기 위해서 양만 제물로 드리지 않았습니다. 소를 드릴 때도 있었고, 염소를 드릴 때도 있었고, 비둘기를 드릴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제물 가운데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드려지는 희생 제물은 오직 양밖에 없습니다. 즉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한 것은 날마다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는 속죄제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기자는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68:19)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날마다우리의 죄의 짐을 져주시기 때문에 날마다 우리의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고백은 주일에 교회에 와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 직장, 사업장에서도 해야 합니다. 삶속에서 매 순간마다 해야 합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하고, 길을 갈 때에도 해야 합니다. 어제 잘못을 고백했다고 오늘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오늘 잘못을 고백했다고 내일 고백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을 범하는 순간 잘못을 주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온갖 고통가운데 사는 것은 죄를 짓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을 고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렇게 죄를 고백해야 한다고 하니까 죄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죄보다 더 큰 문제는 없습니다. 인생의 문제는 곧 죄의 문제입니다. 왜 그럴까요? 모든 문제가 죄로부터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불행은 단지 보이는 현상에 불과할 뿐, 모든 문제의 뿌리에는 죄가 웅크리고 있습니다. 성경이 뭐라고 합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3: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107:10-11).

    우리 인생의 모든 불행이 다 죄 때문에 발생합니다. 죄는 영혼의 암입니다. 치료받지 못하면 영혼이 죽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집니다. 육신의 질병이 생깁니다. 생존의 고통이 다가옵니다.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고 초청하십니다. 죄는 자신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오늘 주님은 나의 죄의 짐을 져 주시기 위해 곁에 와 계십니다. 주님께 모든 짐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요한이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하면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29절과 36절을 보십시오. ‘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는 말은 단지 바라 보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자는 오직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에 오직 그분만을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 것들을 바라보고 의지하다가 실망하고 절망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믿던 사람들을 통해 절망합니까? 우리는 매번 선거철이 되면 어떤 후보가 잘 할거라 생각하고 뽑아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더 이상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절망합니다. 또 탤런트, 영화배우, 가수와 같은 연예인들을 바라보며 환호하지만, 그들 역시 도박, 마약, 학력부정, 성폭행 등의 문제를 일으켜서 실망을 안겨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고 그래도 믿을 사람은 배우자와 자식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배우자나 자식이 정말 믿을 만합니까? 알면 알수록 살아보면 살아 볼수록 허물투성이요 단점 투성입니다. 또한 자식들도 기대를 걸고 사랑을 다 쏟아서 키우지만 다 제 갈 길로 갑니다. 사실 알고 보면 이 세상에는 우리가 바라보고 의지할 대상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가 의지할 대상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12:1-2)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바라보되 어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지 아십니까? 먼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영광의 주님을 먼저 바라보면 안 됩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감당하신 저주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민수기 21장을 보면 이스라엘백성들이 광야를 걸어갈 때에 에돔 족속이 통과하지 못하게 하자 왕의 길이 아닌 험난한 홍해 길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러자 그로 인해 이스라엘백성들의 마음이 상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불뱀을 보내셔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모세에게 나아와 우리가 원망하여 죄를 범했으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그 재앙이 떠나가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어떤 처방을 내리십니까?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21:8)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놋뱀에 물린 자들이 장대에 달아 놓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3:14-15).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였던 찰스 스펄전은 16세가 되던 1849년에 구원의 확신이 없어 고통하고 있었습니다. 그해 12월 시골의 한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는데 그날따라 너무 눈이 많이 와서 목사님이 설교를 하러 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시골교회에 한 할아버지 장로님이 단상에 올라가더니 좀 어색한 목소리로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설교의 내용이 바로 본문에 나오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이었습니다. 그는 이 말씀에 기초하여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나를 바라보라 내가 수많은 핏방울을 흘리고 있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는 십자가에 매달려 있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는 죽었고 묻혔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는 다시 살아났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는 하늘로 들리움을 받았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는 아버지의 오른쪽에 앉아 있노라/ 오 불쌍한 죄인들이여 나를 바라보라, 나를 바라보라 어린 스펄전은 이 단순한 설교를 통해 눈을 들어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었고 즉시 예수님을 영접하여 죄 사함과 구원의 확신을 덧입고 변화된 새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듬해인 17살 때 워터비치 침례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설교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평생 설교자로서 자신을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을 바라보고 영접하면 죄 사함을 받고 변화되어 새로운 인생, 죄의 짐으로부터 자유로운 인생, 기쁨이 충만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돈이 많고 힘 있는 사람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세상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그곳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곳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곳에는 배신과 상처와 절망이 있을 뿐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곳에 구원이 있고, 생명이 있고, 살 길이 있고, 소망이 넘치게 됩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바라만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를 증거하였습니다. 3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무슨 말입니까? 세례 요한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어린양이심을 알게 되자 그를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만났다면 예수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음식 맛이 좋은 식당을 발견하면 자발적으로 그 맛집을 자랑합니다. 평범한 말로 하지 않고 극찬하는 단어를 연발하며 자랑합니다. 또 말로만 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돈을 들여서 한턱 쏘면서 홍보합니다. 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만 대부분이 예수님을 증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자랑하기 위해 물질과 시간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왜 우리에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거나 예수님을 만났지만 마귀에게 속아서 그 행복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진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자랑하지 않고 있는 것은 마귀에게 속아서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자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몇 해 전, 서울 시민 45천 명을 대상으로 서울시민 행복지수를 조사했습니다. 조사 결과 자치구 25개 중에서 서초구와 용산구가 72점을 받아 가장 높았습니다. 그런데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40.6%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돈이 얼마나 있으면 행복하느냐?”라고 묻자, 10억에서 50억 사이라고 답한 사람이 39.25%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10-50억이 있으면 행복할까요? 절대로 돈이 많다고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왜 돈과 명예와 권력을 가진 재벌 오너가 자살을 합니까? 오직 예수께서 자신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심을 믿고 구원 받아야 진짜 행복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사라지고 변하기 때문에 아무리 돈과 권력과 명예를 갖고 있어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셔서 자녀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자랑하면 지금보다 더 행복해집니다. 세상이 줄 수 없고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한 스테반 집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가 순교할 때에 그의 얼굴이 어떠했을까요? 슬픔과 걱정과 근심이 가득한 얼굴이었을까요? 아닙니다. 해같이 빛나고 훤히 웃는 얼굴이었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한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은 없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행복은 우리를 영원한 죄에서 건져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아직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시는 분이 계시다면 오늘 예수께서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심을 믿고 구원을 받게 되시기를 바라고, 이미 영접하신 분은 그분만으로 행복을 누리고 아직도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모르는 분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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