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느 10:28-39 2014.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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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느 10:28-39 2014.7.202018-12-03T21:52:0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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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 의학자 해리스 박사는 인간은 세 가지 경우에 천성이 변한다고 주장합니다. 첫째는 현재 상황이 너무 괴로울 때, 둘째는 소망이 안보일 때, 셋째는 유레카 상황에서 변한다고 합니다. 유레카는 아르키메데스가 욕조의 가득찬 물속에 들어갔을 때 욕조에 몸을 가라앉힌 부피와 같은 양 만큼의 물이 넘친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고 유레카(발견했다는 뜻)라고 외친데서 비롯된 말로서 갑자기 어떤 깨달음을 얻은 경우를 뜻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와 같은 상황을 만나면 정말 천성이 변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혹 변해도 잠시 뿐 근본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 사람은 좀처럼 변화되기 힘든 것일까요?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윤형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윤형본능은 눈을 가리고 걷게 할 경우 똑바로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은 같은 길을 빙빙 도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알프스에서 조난당한 사람을 통하여 입증이 되었습니다. 알프스에서 조난당하고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었는데, 13일 동안 넓고 험준한 얼음산을 방황하다가 구조대로부터 구조를 받았답니다. 어떻게 이런데서 13일 동안을 살아남을 수 있었느냐고 묻자 그는 얼어 죽지 않으려고 계속 걸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걷고 잠깐 쉬고 또 걷고, 졸면 죽는다는 생각에 조금씩 먹어가면서 13일 동안을 줄곧 걸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조대가 그가 걸어온 과정을 살펴보았더니 반경 6킬로미터 내를 뺑뺑 돌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에는 이렇게 제 자리로 복귀하려는 윤형본능이 있기 때문에 변화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윤형본능을 불교에서 주장하는 윤회설의 개념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설은 모든 생명은 자신이 지은 업보에 따라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의 육도(六道)혹은 육취에서 삶과 죽음을 반복한다는 교리입니다. 즉 윤회설은 인과응보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본능에는 인과응보의 개념이 전혀 없습니다. 단지 처음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회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해가 뜨고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이 이리 돌며 저리 돌아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듯이(1:5-6) 처음으로 돌아가려는 본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윤형본능이 있을지라도 삶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직선본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목표를 향하게 나아가게 하고 그것을 달성하게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55:10-11)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동안 변하지 않던 사람들이 어떻게 변하게 되었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저는 본문을 중심으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변할 수 있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느헤미야의 성벽재건과 에스라의 말씀 부흥 운동을 통하여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살펴보았듯이 그들은 새로운 삶을 살기로 서약하고 서명을 하였습니다. 느헤미야 101-27절까지는 그 선언문에 사인한 민족 지도자 84명의 명단이 나오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들이 서약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서약문을 통하여 그들의 변화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28-29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 남은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느디님 사람들과 및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는 모든 자와 그들의 아내와 그들의 자녀들 곧 지식과 총명이 있는 자들은 다 그들의 형제 귀족들을 따라 저주로 맹세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종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우리 주 여호와의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를 지켜 행하여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그들이 어떻게 삶의 변화가 이루어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따라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를 지켜 행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울 때에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변화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31,173개의 구절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 한 구절의 말씀만 붙들어도 인생은 바뀔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정욕의 노예에서 벗어나 성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마음의 번민으로 정원의 무화과나무 밑에서 울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때에 갑자기 들고 읽으라, 들고 읽으라는 어린아이의 노랫소리를 듣고 곁에 있던 로마서 1313~14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또한 어거스틴의 회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 중에 안토니우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빈 무덤에서 수도생활을 할 수 있었는지 아십니까? 이집트의 한 시골 마을의 예배당에 들어가서 마태복음 1921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19:21). 율법적인 의로 자신의 양심을 만족시키려다가 절망에 빠진 존 번연이 어떻게 구원의 확신을 얻고 천로역정을 집필할 수 있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요한복음 637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가 어떻게 당시 절대 권력을 가진 구교에 항거하여 종교개혁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까? 로마서 117절 말씀 때문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어떻게 윌리암 캐리는 세계선교를 위해 인생을 불살랐습니까? 네 장막터를 넓히라는 이사야 542절 말씀 때문입니다. 어떻게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세상의 부귀와 영광을 버리고 아프리카 선교사로 헌신할 수 있었습니까? 가서 제자 삼으라는 마태복음 2819-20절의 말씀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 한 구절만 붙잡아도 변화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단지 말씀을 많이 읽거나 안다고 변화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한 구절이라도 목숨 걸고 붙잡을 수 있는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면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2.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당시 이스라엘백성들의 삶의 방향을 어디로 향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32절에서 39절까지 일곱 차례나 오직 하나님의 전을 위해서 헌물을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오직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헌물을 드리겠다는 것은 그들의 삶의 방향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들은 초막절을 지키면서 말씀을 통하여 그들의 잘못을 깨닫고 변하자, 하나님의 전을 위해서 헌물을 드리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삶의 변화와 하나님을 향하는 것은 서로 비례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이 세상을 향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세상을 향하고 하나님을 향하지 않았다는 것은 바알신을 섬긴 것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바알은 풍요의 신입니다. 그들이 세상의 풍요를 상징하는 바알 신을 섬긴 것은 하나님보다 이 세상을 더 사랑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만 삶의 변화가 없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것을 추구하지 않고 이 세상 나라의 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만 시선을 고정시키기 때문입니다. 즉 기복신앙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5:31). 그렇습니다. 우리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을 이 세상의 부귀와 영화에 두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것에 시선을 고정시키면 결코 삶의 변화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제 삶의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3:2). 우리의 관심이 하늘을 향한 만큼 삶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3. 구체적인 삶을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결단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이방인과 통혼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30). 그들은 자신의 딸을 이방인에게 주지 않고 또 아들을 위하여 이방인의 딸을 데려오지 않겠다고 서약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서약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방인과 결혼하지 말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34:16, 7:3-4; 23:12-13).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방인과 결혼을 금하신 것은 그렇게 하면 그들의 신앙조차 잃어버리고 이방신을 좇아가게 되어 결국은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과의 결혼으로 타락하고 망하였던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솔로몬 왕입니다. 솔로몬 왕은 본처 외에 1,000명의 이방여인을 후처로 두었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솔로몬의 마음을 돌이켜 아스다롯, 밀곰, 그모스, 몰록 등을 섬겼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이 시대에도 그리스도인이 비신자와 결혼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후 6:14-16).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청년들은 결코 비그리스도인과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비신자와 결혼시키지 않겠다고 결단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조건을 보고 결혼하면 안 됩니다. 상대방이 주님을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적인 조건만 보고 결혼하면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둘째로, 안식일을 지키겠다고 했습니다(3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을까요? 단지 피곤하기 때문에 쉬라고 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를 드림으로 멈출 줄 모르는 세상의 욕망을 억제하고 참 쉼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쉼이 없으면 불같이 타오르는 욕망에 제동을 걸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욕망을 억제하지 않으면 만족을 느낄 수 없고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신약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안식일을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안식일을 주일로 대체하여 지키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을 완성하시고 일요일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단지 일주일 중에 하루만을 주님의 날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한 주의 첫 날에 주님께 나아와 예배를 드림으로 한 주가 모두 주님의 날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일에 주님께 나아와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은 모든 날의 주인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현대인에게 주일은 선악과입니다. 여러분의 형편에 따라 주일을 지키면 안 됩니다. 주일에 가족의 애경사가 있다고 주일을 범하면 안 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일성수를 하겠다고 결심하면 하나님께서 주일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셋째로, ‘스스로성전세를 내겠다고 했습니다(32-35). 원래 성전세는 출애굽기 3011-16절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당시 성전세는 이십 세 이상 된 백성들이 생명의 속전으로서 반 세겔씩 바쳤고 성막 건물을 제작하는 비용으로 쓰여졌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예수께서도 성전세를 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17:17-22).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이 성전세를 스스로내기로 약속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당시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정규적으로 세금을 납부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의 생활형편이 어려운 상황에서 국가에 내는 세금 외에 성전세를 스스로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전세 뿐만 아니라 성전에 쓸 것을 스스로 드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들의 자원적인 헌신을 보면서 우리의 헌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과연 나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신하므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남은 생애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신할 것을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넷째로, 첫 열매와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했습니다(36-39). 하나님께서는 첫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들은 말씀을 통해서 이것을 깨닫고 첫 열매를 하나님의 전에 드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백성들이 십일조를 왜 드렸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구약시대에 레위지파는 기업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각 가정을 단위로 십일조를 드리게 하셨고, 또한 레위지파는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받은 십일조에서 십일조를 떼어 제사장에게 바쳐서 그들이 생활을 하도록 했습니다(27:30). 그러나 당시는 그들이 십일조를 제대로 하지 않아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잘못을 깨닫고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서약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헌금을 드릴 때에 단지 하나님과의 관계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동체의 운영에 책임의식을 가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지만 건축헌금과 장학헌금과 구제헌금 등을 드리는 것은 바로 특수목적에 대한 책임을 갖고 드리는 것입니다. 특별히 십일조를 드릴 때에 십일조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드려야 합니다. 십일조는 말 그대로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소득의 십분의 일은 주님의 것이고 나머지 아홉은 자신의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십분의 일을 주님께 드림으로 모든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혹 그동안 이런저런 일로 십일조생활을 하지 않은 분은 오늘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온전히 십일조를 드리면 주님께서 경제생활을 책임져주십니다.

     

      4. 그러나 말씀을 좇고, 하나님을 향하고, 구체적인 삶을 결단한다고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셔야 변화될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 가운데 기지촌 창녀들, 동성애자, 에이즈 환자를 대상으로 목회를 하는 전우섭 목사가 있습니다. 그는 목회자의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섬기던 교회가 갈등과 반목으로 분열되면서 길거리로 내팽게쳐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래서 목회의 꿈을 접고 사회의 부조리를 척결하겠다고 10년은 학생운동, 10년은 민중운동을 했습니다. 그는 틈만 나면 빈민촌, 철거촌, 고아원, 입양기관을 찾아 그들과 함께 웃고, 울고, 분노하며, 장애인, 불우청소년, 도시빈민들을 위해 살았기 때문에 열아홉의 총각 나이에 벌써 고아 두 명의 양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포주에게 잡혀 연탄불에 달구어진 쇠 젓가락으로 온몸에 상처가 난 13세의 매춘소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녀와 대화하는 가운데 너는 이들을 위해 사역을 하게 될 것이다라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본격적으로 에이즈 환자들, 매춘녀들, 성전환자, 양성애자, 성도착증환자 등을 만나 복음을 전하고 공동체 생활을 하며 그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을 해도 가시적 성과가 없는 현실을 보며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비정상적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계속해서 목회를 해야 할지에 대한 회의가 들었습니다. 급기야는 사역을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마지막으로 예수님께 하직인사를 하기 위해 기도원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기도원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이 돌보고 있는 공동체 여성들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돈을 모아서 점쟁이를 찾아갔다는 연락을 받고서는 더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 여성들은 지난주 자신의 설교에 아멘을 연발하고 은혜를 받았다고 한 교인들이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변하지 않는 그들을 보면서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님, 힘들어서 목회 못해먹겠습니다. 지금 죽는 것이 넉넉하오니 내 생명을 취하십시오!” 그런데 바로 그 때 갑자기 자신의 죄인 된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통회와 회개의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네 힘을 빼라. 그리고 너는 가만히 있어라. 네 힘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바로 너의 의(). 너의 자아가 강하고, 네 힘으로만 하려고 해서 이곳까지 너를 데려 오는데 3년이나 걸렸다. 이제 내가 너에게 새 힘과 새 능력을 주겠다. 네가 하려고 하는 모든 의는 결국 잘 포장된 인간의 의다. 네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다라는 것을 인식할 때 비로소 내가 일을 시작할 것이다.” 그와 함께 하늘에서 불덩어리 같은 것이 날아오는 순간 성령의 충만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마음에 평화와 기쁨이 넘쳐흐르고 두려움, 좌절감, 열등의식이 빠른 속도로 소멸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성도들을 돌아보자 사람들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목회에 소망이 생겼고 꿈꾸는 목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자신의 수고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야 합니다. 아무리 말씀으로 제자훈련을 해도 결국 사람이 바뀌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3년간 제자훈련을 하셨지만 제자들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변화된 것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결코 근원적인 변화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충만을 받아 변화된 삶을 살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은 솔개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아십니까? 솔개는 최고 약 70년의 수명을 누립니다. 그러나 약 40년이 되면 발톱이 노화하여 사냥감을 효과적으로 잡아챌 수 없게 되고, 부리도 길게 자라고 구부러져 가슴에 닿을 정도가 되며, 깃털도 짙고 두껍게 자라 날개가 무거워져 하늘로 날아오르기가 힘들어집니다. 바로 이즈음에 솔개는 그대로 죽을 날을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약 반년에 걸친 매우 고통스런 갱생 과정을 수행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갱생을 선택한 솔개는 먼저 산 정상부근으로 높이 날아올라 그곳에 둥지를 짓고 머물며 고통스런 수행을 시작합니다. 먼저 부리로 바위를 쪼아 부리가 깨져 빠지게 만듭니다. 그러면 서서히 새로운 부리가 돋아납니다. 그런 후 새로 돋은 부리로 발톱을 하나하나 뽑아냅니다. 새로 발톱이 돋아나면 이제는 날개의 깃털을 하나하나 뽑아냅니다. 이렇게 하여 날개가 새롭게 나면 다시 힘차게 하늘로 날아올라 30년의 수명을 더 누리게 됩니다. 우리도 살리면 자신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변화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좇고,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을 향하고, 구체적인 삶을 결단하고,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성령께서 도우시면 가능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온전하게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변화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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