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눅7:11-17절 20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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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었던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엄청난 기적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죽었던 청년을 살리신 것을 하나의 기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사건이 던지는 가장 주된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예수께서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즉 이 사건은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주는 또 다른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시대에도 이런 기적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시대에도 이런 기적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 기적을 일으키신 과정을 살펴보면 하나의 공식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공식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면 이 시대에 또 다른 기적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기적이 일어난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기적은 예수님의 계획가운데서 일어났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여기서 ‘그 후에’라는 말은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병들어 죽게 된 백부장의 종을 고치신 후를 말합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기적을 행하신 후 나인성으로 가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100리나 떨어진 나인성으로 가셨을까요? 나인성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면 예수께서 그곳에 왜 가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인성에 오셔서 하신 일은 죽은 자를 살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하여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나인성으로 가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죽은 자를 살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께서 나인성으로 가다가 우연히 장례행렬을 만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이 아니라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기 위해 먼 곳까지 가신 것입니다.
    즉 기적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가운데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계획가운데 기적을 행하십니다. 애굽에서 10가지 재앙이 일어나고, 홍해가 갈라지고, 광야에서 40년간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신 것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지 않으면 이런 기적은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가운데 계속해서 기적을 행하시고 싶어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본문 16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눅 7:16). 죽은 청년이 살아나자 과부의 절망과 슬픔은 한순간에 희망과 기쁨으로 변화되었고 함께 장지로 가며 구슬프게 조가를 부르던 사람들도 기쁨이 충만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렇습니다. 기적이 일어나면 문제가 해결되어 우리에게도 기쁨이 있지만 기적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계속해서 기적을 베푸십니다.
    혹자는 달나라로 여행을 가는 시대에 무슨 기적이 일어나느냐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면 반드시 기적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실 것을 믿고 사모해야 합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하게 하시고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시 107:9-10). 물론 우리가 기적을 사모한다고 항상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사모하는 자에게 기적을 행하시므로 기적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나인성 과부가 기적을 간절히 사모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형편을 볼 때에 기적을 간절히 사모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기적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아도 살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존재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호흡을 거두어가시면 모든 것이 끝입니다. 기적은 사모하는 자의 것입니다. 상황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기적을 사모하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게 해야 합니다.

    둘째로, 기적은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나인성에 도착하시자 과부의 죽은 아들을 메고 가는 장례 행렬을 목도하셨습니다. ‘나인’이란 뜻은 ‘즐거움’이란 뜻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에서 가장 슬픈 사건을 접하셨습니다. 장지가 일반적으로 성 밖에 있었기 때문에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 장례 행렬은 성 밖에 있는 묘지를 향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장례 시에는 두 명 이상의 피리 부는 사람과 한 명 이상의 곡하는 여자를 고용했습니다. 그래서 장례 행렬은 상여를 나르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상여 앞에는 애곡하며 피리를 부는 사람들이 가고, 그 뒤에는 동네 사람들은 조가를 부르며 뒤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례행렬의 뒤를 따라가는 슬피 우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바로 죽은 청년의 어머니인 과부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인을 보시고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예수께서는 그 여인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셨다”는 헬라어로 ‘스플랑크조마이’인데, 이는 창자까지 뒤틀리는 슬픔을 느낄 때에 사용되었습니다. 즉 예수께서는 과부의 슬픔을 목격하시고 속 내장까지 뒤틀리는 듯한 비통함과 연민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마음이 기적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주님께서 이렇게 불쌍히 여기시는 곳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성경에는 많은 기적이 소개되고 있는데 기적의 배후에는 항상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심이 있었습니다. 흉악히 귀신들린 딸을 고쳐주신 것도 예수께서 그녀를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이고(마 15:22), 벳새다 광야에서 보리떡 두개와 물고기 다섯 마리로 5천명이나 먹이는 기적을 베푸신 것도 예수께서 광야에서 방황하는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고, 병든 자들이 고침을 받았던 것도 주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마 14:14).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면 우리에게 기적이 일어납니다. 따라서 기적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께 불쌍히 여기심을 받는 자가 될 수 있을까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해서 기적을 경험한 자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라고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주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이 없이는 결코 주님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라고 말씀하셨듯이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길 때에 주님께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셋째로, 기적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자를 통하여 일어났습니다. 14절 하반을 읽어 보십시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우리는 여기서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방법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시지 않고 죽은 자에게 향하여 직접 일어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어떻게 예수께서 죽은 청년에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 스스로 자신을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를 향하여 일어나라고 명령하신 것은 자신을 하나님으로 인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적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합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 1:12)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사실, 즉 복음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도록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갖고 주신 권세를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기적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확신하고 담대히 예수의 이름을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적과 관련하여 한가지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만일 관 속에 누운 자가 젊은 청년이 아니라 과부의 어머니였다면 예수께서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께서 과부의 노모를 다시 살리셨을까요? 지금까지 우리는 기적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로, 기적은 하나님의 계획가운데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나인성 과부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두 가지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실지 안 베푸실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과부의 죽은 어머니를 살리실 계획을 갖고 계실지, 그리고 그를 불쌍히 여기실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누구를 위해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셨는지를 생각하면 쉽게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께서 누구를 위해 죽은 자를 살리셨다고 생각합니까? 말씀드린 대로 일차적인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그 다음은 누구일까요? 그것은 죽은 아들이 아니라 아들을 잃은 과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과부를 위해서 행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녀의 노모를 살리시기로 계획하셨다면 살리시는 기적을 베푸셨다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왜 제가 이 질문을 던지고 이처럼 결론을 내리는 것일까요? 그것은 자기 자신이 기적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기적을 베푸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적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구원을 받지 않으면 구원이 아무런 의미가 없듯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는 기적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단지 우리를 구원하는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를 자녀로 삼으신 주님께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기적을 주시고 싶어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셨을 뿐 아니라 홍해를 건너고 40년간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시는 기적을 베푸셨던 것처럼 우리를 자녀로 삼으신 후에도 계속해서 기적을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사모하고 불쌍히 여기심을 간구할 때에 계속해서 기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기적의 구경꾼이 아니라 기적의 주인공이 되시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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