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7장을 통하여 주의 음성을 듣다 느7:-73 2014.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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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7장을 통하여 주의 음성을 듣다 느7:-73 2014.6.222018-12-03T21:50:1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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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지난주 성벽재건공사를 거의 마치고 문짝만 달지 않은 상황에서 대적들이 공격하였을 때에 느헤미야가 어떻게 대적의 유혹을 물리치고 성벽재건 공사를 마무리 했는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오직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오직 주님만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 주 동안 어떻게 사셨습니까?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시고 그분만 사랑하셨습니까? 아니면 온통 세상에 마음을 빼앗겨 강도 만난 자의 삶을 사셨습니까? 신앙생활을 최고로 잘하는 비결은 주님 이외의 그 어떤 것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복을 받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은 성벽공사를 마무리 한 후에 느헤미야가 무엇을 했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성벽공사가 완성되자, 가장 먼저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웠습니다(1). 그런데 문지기와 노래하는 사람들은 어떤 지파의 사람들입니까? 본문 43-45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레위지파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레위지파의 본연의 임무는 성전 봉사입니다. 그런데 왜 느헤미야가 성전 봉사를 주 임무로 하는 레위지파에게 성벽파수를 맡겼을까요? 그것은 대적의 공격으로부터 성을 막지 못하면 성전에서 그 어떤 봉사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성벽을 지키는 것이 성전에서 봉사하는 것보다 우선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레위인들이 성전봉사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외부의 공격을 막아내야 합니다. 적들이 공격해서 성벽이 무너진다면 성전마저 무너지므로 성전봉사를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의복보다 생명이 중요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고 비싼 옷을 가지고 있으면 무엇을 합니까? 목숨을 잃으면 아무 쓸 데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들이 많지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1-33). 이 말씀이 무슨 의미입니까?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보다 더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치하시도록 기도하라는 것이고,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삶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의식주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먼저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을 더 우선적으로 해야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고 하나님과 바르지 않은 관계에서 행하는 것은 모두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 웅장하고 화려하게 보여도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면 반드시 무너집니다. 주님의 통치를 받고 그분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인생의 기초입니다. 이 기초가 튼튼하지 않는 상태에서 열심히 하는 것은 그 무엇이든지 무너집니다. 주님의 통치를 받지 않고 주님과 바르지 못한 상황에서 벌은 돈, 명예, 권세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의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나는 지금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가? 나와 주님과의 관계에 문제는 없는지를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사람들을 세운 후 그 성을 다스리고 관리할 두 사람을 임명합니다. 하나니와 하나냐입니다. 하나니는 12절에 나타난 것처럼,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의 술 맡은 관원으로 있었을 때, 고국에 대한 소식을 전해 주었던 사람으로서 느헤미야의 동생입니다. 또 한 사람은 하나냐로 영문의 관원입니다. 그런데 왜 느헤미야가 하나니와 하나냐를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자로 세웠을까요? 느헤미야는 자기의 동생 하나니를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자로 세운 이유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그러나 하나냐를 세운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충성스러울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 중에서 뛰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2). 그렇습니다. 지도자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충성심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충성스러워야 맡은 일에 성실하고 하나님을 경외해야 자신의 배를 채우지 않고 백성을 진심으로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적어도 하나님께 쓰임을 받기를 원한다면 이런 조건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하나냐를 예루살렘의 지도자로 세운 것은 단순히 그가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 중에서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최상의 것을 받으시고 최상의 것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상의 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아십니까? 그것은 선천적으로 되지 않고 후천적으로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도록 자신을 최상의 상태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최고가 되겠다고 꿈꾸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요셉이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17세부터 장차 위대한 지도자가 되겠다고 꿈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힘쓰는 자를 사용하십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을 다스리는 자들에게 어떻게 성문을 관리하라고 지시하였습니까? 3절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해가 높이 뜨기 전에는 예루살렘 성문을 열지 말고 아직 파수할 때에 곧 문을 닫고 빗장을 지르며 또 예루살렘 주민이 각각 자기가 지키는 곳에서 파수하되 자기 집 맞은편을 지키게 하라 하였노니느헤미야가 언제까지 성문을 열지 말라고 했습니까? 해가 높이 뜨기 전까지입니다. 해가 높이 뜰 때란 해가 중천에 뜰 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해가 중천에 떴을 때 문을 열라는 말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성문은 해가 뜰 때에 맞추어서 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해가 높이 뜨기 전에는 예루살렘 성문을 열지 말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성문 안에는 성전이 있습니다. 따라서 성문을 열고 닫는 것은 성전에서 하는 일을 보호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아침 저녁으로 무엇을 했습니까? 번제를 드렸습니다. 즉 성전에서 날마다 번제를 통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즉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해가 중천에 오기 까지 성문을 열지 말라는 말은 빛이신 주님과 충분히 교제하는 시간을 갖기 전에는 세상을 향하는 마음의 문을 열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주의 빛을 많이 받기 전에는 세상 빛으로 나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TV를 틀어 아침뉴스를 봅니다. 조간신문을 봅니다. 세상음악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충분히 뵙지 못한 상태로 세상으로 나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현상이 벌이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과 조금도 다른 것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처럼 걱정과 근심, 불안, 두려움, 아쉬움, 미움, 불만이 가득한 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부른 찬송가 428장은 우리가 어느 때에 기쁜 마음을 갖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밝은 얼굴 뵈올 때 나의 영혼 기쁘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기쁘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의 얼굴을 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을 많이 가진다고 걱정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녀가 일류대학에 합격한다고 걱정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대하고 그분과 깊은 교제를 나눌 때에 마음의 걱정과 근심이 사라지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가보신 분은 다 아시겠지만 정오의 빛이 비추면 뜨거워서 견딜 수 없습니다. 얼마나 더운지 반석위에 달걀을 놓으면 익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진짜 태양이신 주님의 빛은 우리를 태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지만 그 나무가 불에 타지 않았습니다. 그 옆에 있었던 모세도 화상을 입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세가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빛을 비추시면 생명이 넘칩니다. 은혜가 넘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정오에 햇빛같이 떠오를 때까지 세상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지 말아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오랜 포로생활을 마치고 귀환한 사람들을 지파별, 족보별, 출신지역별로 구분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고 할 때 마침 약 92년 전, 스룹바벨과 예수아 등을 중심으로 돌아왔을 때에 기록했던 족보책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런데 에스라서에 기록된 족보와 느헤미야에 기록된 족보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에스라서 2장에는 가족의 이름 중에서 바니라고 되어 있는데 느헤미야서에는 빈누이라고 되어 있고, 에스라서에서는 거주 지역의 이름이 아스마왯이라고 되어 있는데 느헤미야서에서는 벧아스마왯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에스라서에서는 아스갓 자손의 계보가 1,222으로 나오나 느헤미야서에서는 2,322으로 기록되어 있는 등 숫자에 차이를 보이는 곳만 해도 18곳이나 됩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혹자는 이렇게 성경의 기록이 다른 것을 이유로 성경을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오류가 있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은 성경이 어떤 과정을 통하여 우리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오늘날처럼 특정한 날짜에 출판이 된 것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은 1500, 신약성경은 100년이라는 기간을 거쳐서 기록되었고, 구약 39권이 정경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은 A.D 90, 얌니아 종교회의에서, 신약 27권이 정경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은 A.D. 397년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정경으로 결정된 성경도 원본을 필사한 것이 아니라 사본의 사본을 베낀 것입니다. 그런데 사본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의 대표적인 사본으로는 사해 사본, 맛소라 사본, 사마리아 오경 등이 있고, 신약사본으로는 시내사본, 알렉산드리아 사본, 바티칸 사본 등 단편 사본을 포함하면 수만 개에 이릅니다. 그런데 성경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어느 사본을 참고로 필사를 하느냐에 따라서 다소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소 차이를 보이는 것들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소 성경에 충돌하는 부분이 있다 할지라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마치 빈대를 잡으려고 초가산간을 다 태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6). 이 말씀이 무슨 의미입니까? 성경에는 알기 어려운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혹 그런 구절을 만나면 억지로 풀지 말라는 것입니다. 억지로 푼다는 것은 머리로 이해가 안 되니까 자기 마음대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멸망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해의 대상이 아닙니다. 믿음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이해가 되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자의적으로 생각해서 성경을 불신하거나 시험에 들어 주님을 떠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성경과 바른 관계를 맺으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는 구원교과서이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다. 또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신앙지침서이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신앙생활을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영의 양식이기 때문에 성경을 읽으면 영적으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귀는 이런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사소한 것을 빌미로 성경 전체를 의심하게 하여 믿지 못하게 합니다. 혹 성경에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시험에 드신 분이 있습니까? 그 배후에는 마귀의 전략이 있음을 아시고 떨쳐버리시고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70-72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어떤 족장들은 역사를 위하여 보조하였고 총독은 금 천 드라크마와 대접 오십과 제사장의 의복 오백삼십 벌을 보물 곳간에 드렸고 또 어떤 족장들은 금 이만 드라크마와 은 이천이백 마네를 역사 곳간에 드렸고 그 나머지 백성은 금 이만 드라크마와 은 이천 마네와 제사장의 의복 육십칠 벌을 드렸느니라.” 성전 건축을 위해 드려진 것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떤 족장은 몸으로 봉사를 했고, 어떤 자들은 헌금을 드렸고, 어떤 자들은 제사장이 입을 옷을 드렸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지도자뿐만 아니라 귀환한 백성들이 모두 이 일에 동참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백성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스룹바벨 성전은 완성될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헌신 없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교회가 서울에서 이렇게 번듯한 건물을 소유하고 이 정도의 교세를 갖게 된 것도 여러분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들이 당시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헌신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이 명예를 얻기 위해서 헌금을 드리고, 헌물을 드리고, 헌신을 했을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이 주님께 받은 은혜를 깊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당시 세계 최강대국의 포로로  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가운데서 건져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아야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이 주님께 대한 헌신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한번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은 언제 주님께 드리고 싶은 마음이 뜨거웠습니까?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깨닫고 주님께 대한 사랑이 뜨거웠을 때입니다. 그때는 어떻게 해서라도 한번이라도 더 교회에 나오려고 했고 한 푼이라도 주님께 더 드리려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식어지자 열정적인 헌신이 사라지고 의무감만 남아 있게 된 것입니다.

    혹 여러분은 독일의 유명한 작곡가 멘델스존의 할아버지인 모세 멘델스존의 러브스토리를 알고 계십니까? 모세는 아주 보기 흉한 곱사등이라 늘 열등감에 젖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한 상인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집의 딸인 프룸체라는 여인을 보고서 한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키도 작고 곱사등을 가진 장애인이라 사랑을 고백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 다시 프룸체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용기를 내어 프룸체의 방문을 두드렸고 드디어 그녀와 마주하여 앉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프룸체, 결혼이라는 것은 하늘에서 맺어준다는 사실을 믿나요?” 그러자 프룸체는 모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그렇다고만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소, 당신이 그 사실을 믿는다니 한 가지 이야기를 해드리겠어요. 한 남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신은 그에게 장차 신부가 될 여자를 말해준답니다. 내가 태어날 때 나에게도 미래의 신부가 정해졌습니다. 그 때 신은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아내는 곱사등이일 것이다‘. 그래서 난 소리쳤습니다. ‘안됩니다. 차라리 나를 곱사등이로 만드시고 나의 아내에게는 아름다움을 주십시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곱사등이로 태어났습니다.” 그 말을 듣자 프룸체는 고개를 돌려 모세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자신이 아름답게 된 것은 모세가 대신 곱사등이가 되었기 때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살며시 다가와 모세의 손을 잡으며 그의 청혼을 수락했고 훗날 그의 헌신적인 아내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단지 모세 멘델스존과 프룸체만의 러브 스토리가 아닙니다. 우리와 주님과의 러브 스토리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 때문에 죽어야 하고 죽은 다음에는 심판을 받아 지옥에 던져져 영원히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과 심판과 지옥의 굴레에서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곱사등을 대신하여 자신이 친히 곱사등이 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넘치는 사랑을 받아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서 헌신해야 합니다. 헌신하되 과거적 헌신의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과거적 헌신을 현재화하고 그 헌신을 계속해서 불타오르게 해야 합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과거에는 뜨겁게 헌신했지만 지금은 그 열정이 멈춰서 버린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빨리 무슨 이유로 주님께 대한 사랑이 식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16:22). 에베소교회가 왜 하나님께 책망을 받았습니까? 그들이 주님께 대한 첫 사랑을 버렸기 때문입니다(2:4).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책망을 받습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저주를 받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으면 안 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느헤미야서 7장을 통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몇 가지 음성을 들었습니다. 의식주 문제보다 하나님의통치를 구하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최고로 경외하는 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루를 시작하기전 충분히 주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기 때문에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시험에 들어 주님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이 멈추면 헌신이 멈추기 때문에 주님을 지속적으로 사랑하므로 헌신을 현재화해야 합니다. 이 음성에 순종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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