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의 관심과 기도를 배워요! 느 1:1-11 20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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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의 관심과 기도를 배워요! 느 1:1-11 2014.3.92018-12-03T21:15:38+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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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부터 매주 느헤미야서를 강해하도록 하겠습니다. 느헤미야서는 13장이기 때문에 전 권을 강해하는데는 적어도 수개월이 걸릴 것입니다. 본서에는 수백 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유독 느헤미야의 활동만을 소개하고 있지 다른 사람의 활동에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느헤미야를 통하여 우리에게 교훈하실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고 넘치는 은혜를 받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느헤미야가 활동하던 시기가 아닥삭스다 왕이 통치하던 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닥삭스다 왕 제 이십년은 기원전 445년 경입니다. 당시 유대민족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서 살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도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서 수산궁에서 아닥사스다 왕의 술관원으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닥삭스다 왕은 여러 개의 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궁이 수산궁이었습니다. 고고학자에 의하면 수산궁은 1.6평방 킬로미터나 될 정도로 규모가 컸고 금과 은과 상아로 지어져서 수려하고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당시 술관원은 왕을 독살할 음모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먼저 술을 맛보는 일을 하는 자였는데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 밑에서 바로 이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대통령 비서실장 정도에 해당하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세상의 부귀와 영광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느헤미야에게 두 가지 비보가 들려왔습니다. 하나는 유다에 남은 자기 민족이 큰 환난과 능욕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성이 훼파되고 성문들이 불탔다는 것입니다(3).

      그런데 느헤미야가 이런 비보를 어떻게 알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느헤미야가 고국으로부터 온 형제들 중 하나니에게 고국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형편을 묻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습니다(2). 즉 느헤미야가 두 가지 비보를 알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라 그가 고국의 상황을 알아보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느헤미야는 수산궁에서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왜 고국의 형편을 알려고 노력했을까요? 그것은 느헤미야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 민족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관심을 낳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관심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에 관심이 있다는 것은 그것을 사랑한다는 것이고 관심이 없다는 것은 곧 그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무엇에 가장 큰 관심을 쏟고 있습니까? 자신의 안일과 편안함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만 사랑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도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만 사랑하면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모두 단절됩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돈이 대신하여 채우게 됩니다. 자기사랑과 돈 사랑은 맥을 같이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세의 징조를 말할 때에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딤후 3:2)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돈을 사랑하는 것을 일만악의 뿌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딤전 6:10). 한국교회는 지금 위기상황에 놓여있습니다.  이제는 10명 중 2사람만 교회에 대해 기대를 한다고 말할 정도로 교회는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지도자부터 자기만 사랑하므로 돈을 사랑하게 되었고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만 사랑하는 마음과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사랑과 관심을 대상을 바꾸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서 하나님과 이웃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다시 한 번 제 마음을 새롭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 주님 저부터 자신보다 교회와 이웃을 사랑하겠습니다. 이 시대의 또 다른 느헤미야로 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니까 지레 겁을 먹고 그런 일은 자신과 거리가 먼 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안부를 묻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도 고국에서 온 자들에게 안부를 묻는데서 사랑을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한 동안 안녕하십니까?”가 유행했습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지극히 작은 관심을 갖고 서로 안부를 묻고 관심을 가지면 서로 안녕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조금만 이웃에게 관심을 가지면 세 모녀 자살과 같은 불행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세 모녀 자살은 단지 그들의 죽음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만 사랑한 죄의 결과인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자기 민족과 예루살렘성에 대한 비운의 소식을 접하자 어떻게 했습니까? 4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느헤미야가 불행한 소식을 들었을 때에 수일동안이나 울고 슬퍼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느헤미야가 비보를 접한 후 수일동안이나 앉아서 울고 슬퍼했을까요? 혹자는 느헤미야가 고국에 대한 비보를 접하고 운 것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우시고,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우시고,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실 때에 우신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느헤미야가 비보를 접하고 수일동안 울고 슬퍼했던 것은 그만큼 진심으로 자기백성과 예루살렘성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상대방의 불행이 자신의 불행으로 느껴집니다. 상대방의 기쁨과 슬픔이 자신의 슬픔과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가 불행한 일을 당했는데도 감정의 동요가 없는 것은 그에게 관심과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작년에 만델라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에 남아프리카공화국 백성들은 울고불고 난리가 났지만 우리는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우리에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성도들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그 때에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자신 안에 관심과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런 느낌이 없다면 지금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고 우리는 그 몸의 각 지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몸이 어느 곳만 아파도 전체가 통증을 느낍니다. 만일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죽은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살려면 서로의 고통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성도의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면 이미 우리 교회는 주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도 힘든 일을 만나면 서로 돕는데 같은 교우가 어려운 일을 만난 것을 알고도 전혀 도울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이미 영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12:15-16). 우리는 교회의 지체이기 때문에 서로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느껴야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서로를 돌아보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자기백성과 예루살렘성에 관한 비보를 듣고 울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기도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4절 후반절). 왜 느헤미야가 밥을 먹고 힘을 얻어 기도하지 금식하며 기도했을까요? 종전에 살펴본 대로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 아래서 술관원으로 있었기 때문에 먹을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모든 것이 풍족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가 금식하며 기도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금식이 기도의 응답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금식하며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셨는지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스더는 자기 민족이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 놓이자 삼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자 민족을 위기에서 건져냈습니다. 유다왕 여호사밧은 모압자손과 암몬 자손이 공격해왔을 때에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자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왕하 20). 그렇습니다. 금식은 하나님을 움직이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느헤미야는 바로 이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혹 여러분이 꼭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금식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부모가 악할지라도 식음을 전폐하고 매달리면 자식의 소원을 들어주는데 하물며 천부께서 금식하며 매달릴 때에 응답해주시지 않겠습니까? 가정주부도, 직장인도 3일 정도는 금식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요나가 3일 금식으로 고통에서 해방된 것처럼 3일간이라도 금식하며 매달려 간구하면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3일 금식을 해도 건강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혹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장기금식을 세 번이나 해도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금식할 때에 감동을 받으시고 구원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줄 알고 기도했습니까? 하나님께서 크고 두려우실 뿐만 아니라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5). 당시 전 세계에서 최고의 힘을 쥐고 있었던 나라가 메대 파사인데 느헤미야가 모시고 있던 왕이 바로 아닥사스다였기 때문에 느헤미야가 직접 아닥사스다왕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왜 왕에게 구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께 도움을 청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문제보다 크시고 기도하면 자신에게 긍휼을 베푸심으로 응답해주신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고 있는 문제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시지 못한 문제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에 응답해주신다는 약속을 지키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주십니다. 어느 날 알렉산더 대왕이 자신을 위하여 충성을 다한 참모들을 불러 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그동안 전쟁에 수고가 많았소. 소원을 들어줄테니 한 가지씩 소원을 말해보시오.” 그러자 어떤 참모는 집을 사달라고 했고, 어떤 참모는 장기간 휴가를 보내달라고 하였고, 어떤 참모는 높은 자리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데닉이라는 참모는 정복한 여러 나라 중에 한 나라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 요청에 알렉산더 대왕이 어떻게 했을까요? 그가 요청한 대로 한 나라를 주었습니다. 그는 한 나라를 주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그대는 나 알렉산더가 한 나라를 떼어줄 수 있을 정도로 큰 사람으로 믿어주었기 때문에 나 역시 그대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기도하느냐에 따라 응답의 내용이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있는 크신 분이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약속을 지키시는 분으로 믿고 구하면 그대로 응답해주십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기도하면서 자기 민족의 죄를 대신 자백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6절을 한 번 읽어보시겠습니다.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여기서 우리는 아주 독특한 장면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자손이 주님께 범죄한 죄를 대신하여 회개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회개는 원칙적으로 죄를 범한 자가 해야 합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민족의 죄를 자기가 대신 회개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무런 죄가 없으시지만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주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아무 죄가 없으십니다. 그런데 그분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본 받는 자들입니다. 우리도 이 정신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말씀으로 살지 못하는 자들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와 잘못을 자신의 죄와 잘못으로 끌어안고 대신 회개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잘못 살고 있는 자기 백성들을 비판하고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그 죄와 잘못을 지고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혹 계속해서 여러분을 괴롭히고 아픔을 주는 자들이 있습니까? 그들을 미워하지 마시고 그들의 잘못을 대신 회개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혹 남편과 자식이 속을 썩이고 있습니까? 그들을 정죄하지 마시고 대신 회개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렇게 기도할 때에 주님이 감동을 받으시고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주님을 감동시키지 않는다면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자손의 죄를 고백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1:7). 느헤미야가 죄를 고백한 것은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한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을 회개 했습니다. 우리는 느헤미야의 회개를 보면서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우리와 느헤미야의 회개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에게 있어서 죄는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지 우리의 삶 자체가 아닙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금하는 일을 하지 않고 착하게 산다고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으면 죄 가운데 거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의롭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순종해야 할 최고의 최고의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가서 제자 삼으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이것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승천하시면서 가서 제자 삼으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말씀으로 양육하여 제자 삼고 있습니까?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을 찾아보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지 못하고 있는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지막 명령에 불순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달라고 구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주님의 응답을 받고 싶으시다면 이 명령에 불순종한 것을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느헤미야는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8-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을 것이요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1:8-9). 이 말씀은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29,30장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기도할 때에 어떻게 이 말씀을 인용할 수 있었을까요? 기도하다가 눈을 뜨고 각 장을 펼치면서 자신이 원하는 말씀을 인용했을까요? 아닙니다. 기도하던 중 마음에 새겨져 있는 말씀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길 수 있었을까요? 반복해서 말씀을 읽고 암송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에만 둔 사람, 눈에만 둔 사람, 머리에만 둔 사람은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마음에 둔 사람만 약속을 붙잡고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어떻게 말씀으로 물리치실 수 있었을까? 날마다 말씀을 읽고 암송하시므로 마음에 새겨두셨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사울 왕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였을 때에 시험을 이길 수 있던 것도 평소 말씀을 마음에 새겨두었기 때문입니다(119:11). 여러분이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아도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지 않으면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할 수 없고 또 삶에 적용하므로 삶의 변화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계속해서 말씀을 가까이 하여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돕기 위해서 주보에 지난 주 설교 중에서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답을 하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주에 들었던 말씀을 다시 나눔으로 잊어버렸던 말씀을 회복해야 그 말씀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혼자만 기도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뿐만 아니라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도 자기 민족의 환난과 예루살렘성의 복원을 위해 기도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1). 그렇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을 복원하는 일을 자신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일에 동참하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혼자서만 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일의 성취가 늦어지거나 어려움이 생기면 쉽게 낙심하고 포기하게 됩니다. 엘리야를 보십시오. 그가 바알선지자와 싸울 때 자기 혼자서만 싸우는 줄 알고 낙심해서 로뎀나무 아래로 가서 죽여 달라고 하자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자가 7천명을 숨겨두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혼자서 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에 함께 할 자들을 숨겨놓으셨습니다. 여러분의 기도제목이 주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혼자라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혹 여러분이 가족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있지만 1020년이 되어도 변화의 조짐이 없어 낙심하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혼자만 기도하지 않고 중보기도팀과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절대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제자훈련사역을 전 세계에 보급하기 위하여 D3왕의사역을 창안하고 그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힘들고 어려워도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것은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돕는 자들을 숨겨 놓으시고 때가 되면 벌떼처럼 달려들어 돕게 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기도로 세상을 다스리신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자를 통하여 세상을 움직이십니다. 우리가 관심의 대상을 자신에게서 이웃과 교회와 민족으로 바꾸고 기도하면 세상을 다스리는 진정한 리더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처럼 이 시대에 귀하게 쓰임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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