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뤄져야 합니다. 누가복음 23장 13-25절. 2018.7.15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뤄져야 합니다. 누가복음 23장 13-25절. 2018.7.15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뤄져야 합니다. 누가복음 23장 13-25절. 2018.7.152018-12-03T23:51:47+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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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은 예수께서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되도록 판결이 내려지기까지의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AD.26-36까지 팔레스타인을 다스린 로마 제국의 제5대 총독입니다. 그는 로마 총독으로서는 유일하게 예수를 직접 대면하는 특별한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어떤 관계로 만났습니까? 재판관과 피고인의 관계로 만났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했지만 예수께서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했습니까? 즉시 예수를 석방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13절입니다.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왜 빌라도가 예수님을 즉시 무죄석방하지 않고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을 불러 모았을까요? 그의 무죄석방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빌라도는 그들이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무죄석방을 강행하면 대제사장과 관원들과 백성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를 대비하기 위해 그들을 부른 것입니다. 한마디로 빌라도가 대제사장과 관원들과 백성들을 부른 이유는 그들을 두려워하여 일종의 타협을 시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당시 빌라도는 대로마제국의 총독으로 막강한 힘을 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두려움이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모든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은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알고 그들이 왜 두려운지를 깨닫게 해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무리를 두려워하여 타협한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아십니까? 예수님을 무죄석방하지 못하고 도리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는 단초를 제공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즉 빌라도가 무리를 두려워하여 그들과 타협한 것은 도리어 함정을 판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왜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될까요? 그것은 사람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꾀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언 29장 25절은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빌라도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하나님을 믿는 자들도 사람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다가 낭패를 당한 자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랄 지역에 갔을 때에 아비멜렉 왕이 혹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자기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그의 아내로 삼으려고 부하를 보내서 데려갔습니다. 바로 그 때에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셔서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이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창 20:3)라고 말씀하셔서 다행히 아브라함의 품으로 다시 올 수는 있었지만 그 일로 아브라함은 그랄 지역에서 수치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어디 아브라함만 그랬습니까? 믿음의 사람이라고 불렸던 다윗도 그랬습니다. 사울 왕이 그를 죽이려고 하자 다윗이 이웃 나라 가드 왕 아기스에게 갔습니다. 그러자 신하들이 다윗을 알아보고 왕에게 보고하자 다윗이 가드 왕을 두려워하여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고 미친 사람인 척했습니다(삼상 21:10-15). 그러자 아기스 왕은 다윗을 미치광이로 취급을 했습니다. 따라서 어떤 문제로 두려움이 엄습해 올 때에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것을 해결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빌라도가 타협하기 위해 그들을 불러 모으고 한 말이 무엇입니까? 14-15절입니다.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자신만 예수님이 죄를 범한 자가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헤롯 역시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때리는 선에서 고소 건을 마무리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빌라도가 재판 건에 헤롯을 끌어 들인 것은 예수께서 무죄하심을 알고 석방하려고 하지만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들을 설득시키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빌라도가 이렇게 한 것은 예수님을 석방하기 위해서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하여 빌라도가 예수님을 석방시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점에 있어서는 빌라도는 충분히 칭찬받을 만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무죄하심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즉시 석방하지 않고 예수님을 때린 후에 석방하겠다고 한 것은 비난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빌라도가 예수님을 즉시 무죄 석방을 했더라면 무리들은 더 이상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주장할 수 없었을 텐데 무리들이 계속해서 예수님을 처형하도록 주장하는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그들은 조금 더 밀어붙이면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다고 판단하고 때를 놓치지 않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라고 외치고 그들의 뜻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마귀가 하는 일이 바로 이렇습니다. 우리가 틈을 보이면 여지없이 공격하여 사로잡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마귀가 아담과 하와를 공격하여 넘어뜨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고 그 틈새를 파고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호시탐탐 우리를 공격하기 위하여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신갑주를 입지 않으면 마귀의 공격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방심하지 말고 항상 깨어 근신해야 합니다.

    그러자 무리들이 빌라도의 제안에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18-19절입니다.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빌라도를 때려서 놓겠다 하자 무리들은 민란을 일으킨 바라바를 석방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왜 무리들이 아무 죄 없으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민란과 살인죄를 범한 바라바를 석방하라고 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무리들이 예수님을 추종했던 것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힘없는 자처럼 체포되어 곧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자 더 이상 예수님께 대한 기대가 사라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한 가닥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자는 ‘민란과 살인을 행한 바라바’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자유인이 되면 그를 중심으로 또 다시 민란을 일으켜서 로마정부로부터 자유를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하여 어떤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그들은 계속해서 정치적인 메시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당시 무리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앞세워야 하는데 우리는 계속해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그리스도만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메시아관이 바뀌지 않으면 신앙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신 분이라는 것을 앞세워야 그분을 인생의 주인으로 믿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지, 그렇지 않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분이라는 것을 앞세우면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 시험에 들고 신앙생활을 해도 기쁨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석방하고자 하되 무리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20-23절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 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그들은 집요하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요청할 때에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소리 질러’(21절), ‘큰 소리로’(23절). 한마디로 소리가 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소리가 이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겼다는 것은 그들의 뜻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뜻을 관철시키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사회 각계 각층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노동계입니다. 우는 아이에게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듯이 아무 소리를 하지 않으면 무시하고 짓밟히지만, 힘을 모아 큰 소리를 내면 뭔가를 얻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이 방법이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렘 29:11-12).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2-3). 주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사람에게 큰 소리를 치거나 성질을 부리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사람 앞에서는 큰 소리를 치면서, 하나님께는 큰 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큰 소리를 내어야 할 대상을 바꿔야 합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빌라도는 여러 차례 예수님을 석방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무리들의 큰 소리에 져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모든 신자들이 일주에 한 번씩 그의 이름을 들먹여야 하는 가장 저주받은 자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사도신경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마리아이고 다른 한 사람은 빌라도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역할은 정 반대였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구원사에 참여하여 최고의 영광을 얻었지만, 빌라도는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무리를 두려워하므로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빌라도가 무리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예수께서 죄 없다고 판정을 내렸다면 그의 이름은 좋은 사람으로 영원히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죄를 범치 않으려면 끝까지 범치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 했지만 죄를 범했다면 결국 죄를 지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썼어도 이런저런 이유로 끝까지 말씀을 저버렸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입니다. 물론 정상 참작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에 가졌던 믿음을 끝까지 가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욥이 세 가지 재앙을 당하였지만 끝까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듯이 우리도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24-25절을 읽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 주고 예수는 넘겨 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 본문은 빌라도가 무리의 뜻대로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빌라도 총독이 무리의 주장대로 죄 없는 자를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판결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그들의 뜻대로’입니다. 그들이 계획한 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들의 뜻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은 누구의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과 그들의 뜻이 동일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엄밀히 말하면 무리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통로로 쓰임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상을 받아야지 화를 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이 잘했다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한 자로서 장차 준엄한 심판이 있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수단으로 쓰였다 할지라도 그렇게 쓰임 받은 것이 주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살펴야 합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모른 무지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수단으로 쓰임을 받았어도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당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께서 배신당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가룟 유다에게 팔리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에 가룟 유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를 상받을 자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그가 차라리 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뻔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수단으로 쓰임을 받을지라도 주님의 뜻에 순종하므로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리의 뜻대로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사형언도를 내렸을 때 그들이 어떻게 했을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루살렘 전체가 떠들썩할 정도로 환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환호할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악을 행한 것이고 영원히 심판을 불러온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뜻이 이루어졌다고 기뻐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인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의 뜻대로 이루어지면 순간은 행복할지 몰라도 그것은 망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순간으로는 불행같이 보여도 그것은 영원한 복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지 말고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께서 죽음을 앞두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아시기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이여 만일 아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이다”(눅 22:42). 아직도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멈춰야 합니다. 이제 예수님처럼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제 우리의 뜻은 더 이상 없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함께 죽었습니다. 오로지 주님의 뜻만이 내 안에서 살아나게 해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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