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낮아지면 주께서 높이십니다. 눅 18:9-14 201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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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낮아지면 주께서 높이십니다. 눅 18:9-14 2017.8.82018-12-03T23:34:17+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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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은 제가 자주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여러분에게도 익숙할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라고 불립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누가복음 18장 1-8절의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를 살펴보았는데, 혹자는 지난주에 다룬 비유와 오늘 다룰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가 모두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두 비유가 모두 기도라는 한 가지 주제를 다루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서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가 어떻게 기도를 하면 응답을 받을 수 있는가를 가르친 것이라면,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는 어떠한 기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심을 받을 수 있는가를 가르친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런 해석을 보면서 아주 신선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저와 다른 관점에서 비유를 해석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껏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는 지난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기도에 관한 가르침으로,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는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를 높이신다는 가르침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저와 다르게 해석했기 때문에 과연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옳은 주장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자세히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주장은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옳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와 함께 이를 확인해보겠습니다. 먼저 9절을 읽습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주님께서 이 비유를 누구에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입니다. 14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비유의 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을 통하여 예수께서 이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신 이유가 기도를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말씀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자신을 의롭다고 믿고 자기를 자랑하면 도리어 낮아지게 되고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께서 높이신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 비유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하는 형태를 소재를 삼아 자신을 높이면 낮아지고 반대로 자신을 낮추면 높아진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지, 직접적으로 기도를 어떤 태도를 갖고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의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알기 위하여 크게 세 가지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말씀을 증거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왜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세리를 비유의 주인공으로 설정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어서 알 수 있듯이 이 비유의 주인공은 바리새인과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당시 유대교 종파 중에서 가장 힘 있는 분파 중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엄격한 율법 준수와 전통을 강조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반 백성들에게 영적 지도자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그와는 정 반대였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로마에 바치고 상당 부분은 그들의 주머니에 넣었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매국노와 로마에 빌붙은 앞잡이로 취급을 받았고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두 주인공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누가 ‘좋은 사람’인지, 그리고 누가 ‘나쁜 사람’인지 들어보나마나 뻔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들을 비유의 주인공으로 세우셨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은 예수께서 마음대로 설정하실 수 있습니다. 예를들어 ‘바리새인과 서기관’으로, ‘바리새인과 사두개파’로, ‘바리새인과 열심당원’으로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시지 않고, ‘바리새인과 세리’를 주인공으로 세우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평가하시는 기준과 사람이 평가하시는 기준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평가하는 기준과 예수께서 평가하는 기준이 전혀 다릅니다. 왜냐하면 서로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땅의 것과 육신의 것을 생각하는데 반해,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것과 영의 것을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은 이런 사실에 대해 자주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사람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롬 8:7). 이사야 선지자는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난다고 했습니다(사 55:8-9). 이런 것이 사실로 드러난 사건이 있습니다. 사무엘이 다윗을 왕으로 인선할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에게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라고 하시자 그가 이새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장남인 엘리압을 보는 순간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삼상 16:6)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7절)고 하셨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선지자로 평가받는 자입니다. 그런데 그런 선지자도 사람을 보는 눈이 하나님의 눈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보는 것과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사람이 옳게 생각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옳게 여기시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하여 나는 사람에게 옳게 여김을 받는 자인지,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을 받는 자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둘째로, 세리가 어떻게 바리새인보다 의롭다고 여겨지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14절을 읽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본문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고’(‘데디카이오메노스)가 완료수동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세리를 주권적으로 의롭다고 선포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엄청난 반전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한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얻지 못했고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한 세리를 하나님께 의롭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의 의로운 행실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고 안 되고는 우리의 행위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나면서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해도 의롭게 되는 일에 조금도 영향을 미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의로워지려고 하면 안 됩니다. 날마다 보혈의 피를 의지하고 주께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창세기에 에서의 팥죽 사건을 알고 있습니다. 에서와 야곱이 아버지 이삭에게 별미를 갖다 주었는데 에서는 저주를 받았고, 야곱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왜 둘 다 아버지에게 별미를 주었는데 에서는 저주를 받았고 야곱은 축복을 받았을까요? 에서는 자기의 이름으로 나갔고 야곱의 형의 이름으로 나갔기 때문입니다. 자기 이름으로 나갔다는 것은 ’자기의 의‘로 나갔다는 것이고 형의 이름으로 나갔다는 것은 ’자기의 의가 아닌 다른 의‘로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리새인이 의롭다하심을 받지 못한 것은 자기의 의로 하나님께 나갔기 때문이고, 세리가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은 자신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나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날마다 자기의 의를 내려놓고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나가야 합니다.

    셋째로,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통하여 전달하려는 핵심 메시지는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다시 14절을 읽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맨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라는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의 핵심 메시지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한 내용을 좀 더 들여다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를 살펴보겠습니다. 11-12절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11-12). 다른 사람들처럼 토색(討索),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않으며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감사는 잘한 것인데 그 내용을 보면 잘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감사했지만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교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의 감사가 비교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비교는 교만에서 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더 낫게 평가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또 그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했다고 했습니다. 유대 법에 의하면 금식은 1년에 한 번 속죄일에 행하게 되어 있었는데, 자신들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한다고 했습니다. 이것도 자신을 자랑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금식을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비교에서 나온 자랑이기 때문에 이 또한 교만한 것입니다.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십일조를 드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후대에 이르러 유대교의 랍비들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는 의미에서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 드리게 했는데 그것을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다른 사람보다 십일조를 철저히 지켰다는 것을 자랑한 것으로 교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는 기도를 앞세워 하나님 앞에 자기 자랑만 실컷 늘어놓았던 것입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보다 능력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 아십니다. 하나님보다 더 많이 가졌습니까? 우리가 가져봤자 얼마나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그분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분 앞에서 자랑한다는 것은 보통 교만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배운 것이 많아도 잘하는 것이 있어도 교만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도저히 그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우리의 노력이나 우리의 어떠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우리가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쓸데없는 것으로, 교만한 마음이 생기려는 순간, 모든 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교만하면 낮아집니다. 아니 교만하면 수치를 당합니다. 아니 교만하면 멸망을 당합니다.
    반면에 세리의 기도를 살펴보겠습니다. 13절입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세리도 바리새인처럼 성전에 가서 서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하늘을 우러러 보지 못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왜 하늘을 우러러보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기도할 때에 그가 취한 행동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한마디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가슴을 치며”는 헬라어로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계속해서 치는 반복적인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그가 세리라는 자기 직업을 통하여 지은 죄를 하나하나 떠올려서 계속해서 회개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불쌍히 여기옵소서”는 헬라어로 ‘분노하지 마옵소서’라는 의미로서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다는 것입니다. 세리는 전능자 앞에 자신의 죄악을 숨기 없이 고백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기도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가 겸손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리새인의 기도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교만했기에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죄인인 것을 모르고 감히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자랑한 것이고, 세리는 겸손했기에 잘한 것이 있음에도 자신이 죄인이라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 것입니다. 우리가 겸손한 지 아니한지는 우리의 기도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구하는 내용이 많은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고 자신이 잘한 것을 자랑하고 있다면 교만한 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교만하면 낮아지고 겸손하면 높아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시기 위한 비유가 아닙니다. 교만하면 하나님께 낮추시지만 낮아지면 하나님께서 높이신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최고의 교만은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고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고 겸손은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주님께 용서를 비는 자입니다. 우리 모두 겸손한 자가 되어서 주님께서 높이시는 은혜를 입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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