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힘보다 더 강한 것이 있습니다. 마 22:34-40 201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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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힘보다 더 강한 것이 있습니다. 마 22:34-40 2013.8.42018-12-03T20:36:07+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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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안 긍정을 예찬하는 책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더 시크릿’을 비롯해서 ‘긍정의 힘’ 등 종류만 해도 수백 종에 이릅니다. 긍정 자체는 좋은 것입니다. 긍정을 나쁘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긍정 자체에 마술 효과가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경험담들을 들어보면, 긍정적으로 살아간 결과 성공한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나쁜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고 미리 대비하여 남과 자신의 목숨을 건진 예도 존재합니다. 따라서 긍정을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상황에서 긍정적으로만 생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칼끝에 찔린 상처를 보고도 아프지 않다고 말을 해야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몇 해 전, 조엘 오스틴이 쓴 ‘긍정의 힘’이 전 세계를 흔들어 놓은 적이 있었습니다. 조엘 오스틴이 목사이지만 일반인들의 현실에 대입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계발서와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자는 물론 성공적인 삶을 소망하는 많은 비그리스도인들에게도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글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국내에서는 이미 고인이 된 옥한흠 목사는 강하게 조엘 오스틴을 비판해서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에게 가해진 비판은 대체적으로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오스틴의 주장이 다소 심리학적이고 자기 최면적이라는 것입니다. 심리학 용어가운데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와 ‘노시보 효과’(nocebo effect)가 있습니다.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는 잘 될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그런 결과가 나타나는 경우에 쓰이는 말이고, 반대로 노시보 효과 nocebo effect는 잘 안될 것 같다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그런 결과가 나타나는 경우에 사용하는 말입니다. 즉 ‘긍정의 힘’은 일종의 ‘플라시보 효과’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심리적이고 자기 최면적인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은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느냐가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6)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 자체에 무슨 힘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람이 악한 생각을 하면 하나님께서 사망에 처하게 하시고, 좋은 생각을 하면 생명과 평안을 주시는 것이지, 긍정적인 생각만 하면 모든 일이 잘되고 성공한다고 가르치지 않고 있습니다.

      둘째로, 오스틴이 예수 그리스도 없이 긍정적인 자아를 회복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아(自我, ego)란 자신에 대한 의식이나 관념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자신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인식할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인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에 대하여 무조건 긍정적으로 의식하는 것이 옳을까요? 성경은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죄인이며(롬 5:12) 또한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렘 17:9). 즉 성경적인 자아상은 부정적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긍정적인 자아는 가질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故 옥한흠 목사는 성격을 긍정적으로 개발하면 성공한다고 가르치는 오스틴의 ‘긍정의 힘’을 비성경적이라고 비판하였던 것입니다.

      셋째로, 미국의 수정교회가 파산한 것은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 진정한 성공과 행복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미국 ‘메가처치’의 원조격인 수정교회는 이름대로 온 벽면이 유리(10,664)로 덮여 있고, 내부에는 세계 최대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돼 있고, 자동차극장형 예배 등으로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한때 출석 교인수 1만 명이 넘던 수정교회가 2006년 로버트 슐러 목사가 아들에게 담임목사직을 물려준 이후부터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교인 감소에 세계적인 경제위기까지 겹치면서 재정이 악화일로로 치닫다가 결국은 법원에 파산신청을 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수정교회는 ‘긍정의 힘’으로 성장한 교회입니다. 로버트 슐러는 ‘할 수 있다’의 긍정의 힘을 주무기로 교회성장을 일군 목회자입니다. 그런데 결국 수정교회가 파산을 신청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긍정’으로는 진정한 행복과 성공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함께 ‘긍정의 힘’을 비판하면서 갑자기 떠오르는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긍정의 힘’이 우리를 성공과 행복으로 인도하지 못한다면 무엇이 우리를 행복과 성공으로 인도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이 문제로 고민할 때에 성령께서 저에게 깨닫게 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긍정이 추구하는 방향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즉 긍정이 지향하는 목표가 오로지 자기 자신의 행복과 성공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조엘 오스틴이 쓴 ‘긍정의 힘’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서 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긍정의 힘’의 후속으로 나온 책 이름도 ‘잘 되는 나’입니다. 그러나 개인의 행복과 성공만 추구하면 진정한 행복과 성공을 맛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을 이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이라고 평가합니까? 온갖 권력과 명예와 물질을 자신을 위해서 사용한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북한 최고지도자였던 김일성과 김정일이 가장 성공한 사람으로 평가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람을 성공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을 위대한 사람으로 평가합니까?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살아간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류 역사이래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위대하신 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짜 성공적인 삶을 살고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한다면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과 한 율법사와의 대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당시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약 5%도 안 되던 시절에 율법사는 성경을 읽을 뿐만 아니라 해석을 했기 때문에 그들의 힘은 실로 막강했습니다. 율법사가 예수님께 던진 질문이 무엇입니까?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큽니까?” 우리가 알다시피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아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전달하였습니다. 그런데 십계명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진 후 수많은 계명들이 모세 오경 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이 구약성경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외에도 많은 계명들이 구약성경에 들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계명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지키는 일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기 때문에 율법학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에 해당되는 계명들을 찾아내도록 하였는데 613개의 계명이 있다는 결론을 냈습니다. 그중에 ‘하라’는 명령, 즉 작위 명령이 248개이고, ‘하지 말라’는 부작위 명령이 365개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248개의 뼈마디로 구성된 인간은 일년 365일, 날마다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총 613계명 가운데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인지를 물은 것입니다. 사실은 이전부터 율법학자들 사이에서는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인지를 놓고 많은 논쟁이 있어 왔습니다. 랍비 ‘힐렐’“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라는 황금율을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반면에 랍비 ‘아키바’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를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결정을 내리지 못한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께서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좌우되는데 가장 중요한 계명인 ‘하나님 사랑’에 초점을 맞추면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만 말씀하시지 않고 그와 동일하게 큰 계명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아마도 율법사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동일하다고 말씀하셨을 때에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최고의 계명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사랑하라는 뜻인데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지옥의 땔감으로 만들었다고 말할 정도로 천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깨우치시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비유를 왜 말씀하셨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율법사들의 잘못된 생각을 깨우치시기 위해서 입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거의 반쯤 죽게 된 채로 버려졌습니다. 그런데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것을 보았지만 돌아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제사장은 예루살렘성전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는 임무를 맡은 사람이었고, 레위 사람은 제사장을 돕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선택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반면에 사마리아인은 어떠했습니까? 강도를 만나 거반 죽은 자를 정성껏 돌보았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고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 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마리아인이 ‘상처를 싸맸다’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어떻게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자의 상처를 싸맸을까요? 당시는 상비약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강도를 만난 자는 옷마저도 다 빼앗긴 상태였습니다. 방법은 단 한가지였습니다. 자신의 옷을 찢어서 싸매어 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며, 이튿날에는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주며 비용이 더 들면 여행 후에 돌아와서 갚겠다고 했습니다. 그가 내준 데나리온 둘은 노동자 품삯 이틀에 해당하는 금액이니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습니다. 입으로만 사랑하지 않고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사랑했습니다. 왜 예수께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를 이렇게 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표현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위해서 물질과 시간을 사용하듯이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물질과 시간을 사용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다 보면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하루 일정을 모두 망쳐 버릴 수도 있고 엉뚱한 일에 연루되어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두려움이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치료하면서 한 편으로는 언제 강도가 숨었다가 다시 나타나서 자기까지 해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을 이기고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이렇게 사마리아인처럼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희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워싱턴 로펌 대표변호사 전종준씨가 2013. 07. 19자 조선일보 아침편지란에 기고를 했습니다. 그 내용은 한 마디로 “긍정의 힘보다는 사랑이 더 강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어머니가 갑상선 수술을 하고 회복 중인데, 의사가 운동이 필요하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변호사는 평소 신뢰하고 믿었던 ‘난 할 수 있다’는 긍정적 생각을 어머니에게 전해드리면서 운동을 하시라고 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귀찮아하고 걷지도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공원에 만발한 오디와 산딸기를 따러 나갔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산딸기 주스가 온종일 앉아서 일하는 아들의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들에게 산딸기 주스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는 걷지 않았지만 아들의 건강을 위해서는 걸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사람을 움직인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긍정적인 생각보다 다른 사람을 위한 사랑이 사람을 더 쉽게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록펠러는 33세에 백만장자가 되고, 43세에 미국 최대 부자가 되고, 53세에는 세계 최대의 갑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돈 버는 일에만 매달려 살았기에 세상 사람들에게 악덕기업주란 말을 들었고 마음의 참 행복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55세가 되었을 때, 머리와 눈썹이 빠지고 몸이 마르는 ‘알로페키아’라는 병에 걸려 1년 이상 살지 못한다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기자들은 그의 사망기사를 미리 써 놓고 타전 날만 기다렸습니다. 어느 날, 그가 최후 검진을 위해 휠체어를 타고 병원에 들어서는데 병원 로비에 걸린 액자의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도다.” 그 글을 보는 순간 갑자기 어렸을 때 어머님이 하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3가지를 꼭 당부했습니다. “첫째, 교회를 네 몸처럼 사랑하라. 둘째,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 힘이 되어드려라. 셋째, 소득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께 바치고 십분의 일은 이웃을 위해 써라.” 그 어머니의 음성이 생각나면서 마음속에 전율이 흐르고 눈물이 났습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예수님을 묵상했습니다. 한참 눈을 감고 묵상하는데 옆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병원 사무원과 환자의 보호자가 입원비 문제로 다투는 소리였습니다. 병원에서는 병원비가 없으니까 입원이 안 된다고 하는데 환자의 어머니는 제발 입원시켜 달라고 울고불고 사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록펠러의 마음에 환자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비서를 시켜 그 소녀의 병원비를 대신 지불하게 하고 누가 지불했는지 아무도 모르게 했습니다. 그 소녀는 병원에 입원해서 기적적으로 죽을병에서 살아났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록펠러는 너무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자서전에서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저는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정말 몰랐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베풀면서 살기로 작정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일을 지키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자 신기하게 잘 자고 잘 먹게 되었습니다. 그 후 98세까지 장수하면서 록펠러 재단을 만들어 좋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는 임종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인생 전반기 55년은 쫓기며 살았지만 후반기 43년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늦게나마 이 행복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처럼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행복의 최대 원천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진정한 행복과 성공은 없습니다. 겉으로는 성공한 것 같지만 결국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요즈음 새벽에 창세기를 강해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1장을 보면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아비멜렉과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기로 언약을 맺은 후 그곳에 에셀나무를 심고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에셀나무는 로뎀나무와 함께 광야의 척박한 환경에서도 자랄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에셀나무’를 생각하면 곧바로 ‘이슬’을 떠올린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소금처럼 짠 에셀나무 잎에 그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에셀나무 잎이 엄청나게 짜기 때문에 밤새도록 공기 중에 있는 수분을 모두 흡수합니다. 이로 인해 새벽녘 에셀나무 잎은 상당한 양의 이슬을 머금게 됩니다. 낮이 되어 태양이 비추면 증발하는 열로 인해 다른 나무보다 최소 5-10도 이상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므로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서 광야 길을 걸어가야 하는 나그네들에게 최고의 안식처가 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광야와 같은 인생 길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안식’을 표현하고 싶을 때 반드시 에셀나무를 떠올립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네게브 사막 한복판의 도시인 브엘세바에서 아비멜렉과 거짓을 하지 않기로 맹세하고 에셀나무를 심었던 것은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살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에셀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은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살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이 세상에서 성공한다고 주장하지만 긍정의 힘만으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고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살아야만 자신이 변하고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사랑의 성자 프랜시스에게 굽비오란 마을이 늑대로 인해 피해가 많다는 얘기가 들렸습니다. 그러자 프랜시스는 제자 한 명과 함께 아무런 무장을 하지 않은 채로 늑대 굴로 갔습니다. 늑대는 그들을 보자 으르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프랜시스는 태연했습니다. 그리고 곧 조용히 늑대에게 사랑을 설교하고 두 손을 부드럽게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늑대가 다가오더니 프랜시스의 손 위에 앞발을 올려놓더랍니다. 프랜시스가 늑대의 목을 껴안자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의 힘은 긍정의 힘을 초월합니다. 인간의 힘든 문제를 온전히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긍정의 힘은 잠시 힘과 소망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자신을 변화시키거나 세상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또한 진정으로 행복과 성공의 삶을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우리를 행복과 성공으로 인도합니다. 우리는 ‘아이싱킹’에서 ‘유싱킹’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자신만을 위해 살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겠다고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사랑을 실천할만한 능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여 이웃을 향해 사랑의 손길을 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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