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사람과 달라야 합니다. 눅 6:27-36 201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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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사람과 달라야 합니다. 눅 6:27-36 2016.1.102018-12-03T23:01:21+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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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시 중단했던 누가복음 강해를 다시 시작합니다. 지난 번 강해에서 화를 입거나 복을 받는 것은 운명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느냐에 따라 달려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처럼 우리를 작아지게 하는 말씀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까이 있는 사람조차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데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맺어야 할 관계는 크게 둘입니다. 하나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고, 다른 하나는 보이는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나 사람이나 관계를 잘 맺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굳이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쉽냐고 저에게 묻는다면 사람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해하시지 않는데 사람은 종종 오해하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이유로든 원수관계를 맺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화해자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분처럼 화해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한 절 한 절 해석하므로 자신과 불편한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27-28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본문은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선대하고,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고,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처럼 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정반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 사람들처럼 원수를 대하지 말아야 할 실제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법칙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법칙은 종두득두법칙, 즉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입니다. 이 법칙에 따라 미움을 심으면 미움을 거두고, 저주를 심으면 저주를 거두고, 모욕을 갚으면 모욕을 거두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을 거두기 위해 원수를 미워하는 대신 사랑해야 하고, 저주하는 대신 축복해야 하고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이 한 말이 상대방에게 합당치 않으면 자신에게 다시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원수라고 생각하는 자를 저주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으면 자신이 저주한 말이 도리어 자신에게 임하여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인사법을 통해서 이런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어느 집에 가든지 평강을 빌어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일 빈 평강이 그 집에 합당하면 그곳에 머물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평강을 빈자에게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저주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자신이 빈 저주가 자신에게 다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자들을 미워하거나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29절입니다.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이 명령은 우리가 누군가에게 폭행을 당했을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왼쪽 뺨을 때렸는데 오른쪽도 때리라고 내민다면 상대방을 더욱 더 화나게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상대방의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말라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상대방이 한 대로 자신도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한 대로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신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탈리오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폭력을 똑같이 대처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폭력이 또 다른 폭력을 불러일으키고 폭력의 악순환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또한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만일 우리가 이 말씀대로 한다면 말씀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은 모두 발가벗고 다녀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물질적인 손해를 입었을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팔레스틴 지방은 밤은 춥고 낮은 뜨겁습니다. 밤의 차가움과 낮의 뜨거움을 해결하는 것이 바로 겉옷입니다. 밤에는 겉옷을 덮고 자는 이불로 사용하고 낮에는 따가운 해 빛을 막는 차단제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겉옷은 매우 중요한 물건 중의 하나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러면 누군가가 겉옷을 빼앗을 경우 속옷까지 금하지 말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물질 문제로 다투지 말고 관대함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 말씀대로 순종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가 누구일까요? 바로 이삭입니다. 그가 기근을 만나 그랄 지역으로 가서 살 때였습니다. 그곳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비멜렉왕이 그에게 찾아와서 그곳을 떠나라고 해서 그랄 골짜기로 옮겨서 우물을 팠습니다. 그러자 그랄 목자들과 이삭의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생겼습니다. 그 때에 이삭은 그곳 우물을 다툼이라는 뜻의 ‘에섹’이라 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서 또 우물을 팠습니다. 그러자 그곳까지 찾아와서 다투자 그곳 우물의 이름을 ‘대적함’이라는 뜻을 가진 ‘싯나’라고 하고 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겨서 우물을 팠습니다. 그러자 그곳까지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 이삭은 그 우물을 ‘장소가 넓다’는 뜻으로 ‘르호봇’이라고 지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물질문제로 다투면 그곳에는 믿음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물질 때문에 누군가와 다툼으로 신앙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은 30절입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이 말씀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만일 이 말씀대로 순종하면 하루아침에 부자는 거지가 되고 거지는 부자가 될 것입니다. 또 사람들은 부지런히 일을 해서 얻은 대가로 살려고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구걸해서 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구한다는 것은 그것을 주는 자보다 가난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없기 때문에 구하는 것이고 없어서 못 갚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상대방이 구하는 것을 거절하거나 상대방이 없어서 못주는데 그것을 달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물질보다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한 영혼의 중요성을 알고 물질보다 영혼을 더 우선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성경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 19:17)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자에게 선을 베풀때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억하시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갚아주십니다. 우리가 베푸는 것과 하나님께서 갚아주시는 것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다음은 31절입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윤리의 내용을 요약한 말로서 소위 ‘황금율’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황금율이라고 부르는 것은 3세기의 로마 황제 세베루스가 이 문장을 금으로 써서 거실 벽에 붙인 데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혹자는 예수께서 당시 저명한 유대 랍비인 힐렐(Hillel)과 헬라의 스토아 철인(哲人)들에게 영향을 받아서 황금율을 말씀했다고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만일 예수님의 말씀과 힐렐이나 스토아 철학자들의 가르침이 동일하다면 그렇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힐렐이나 스토아철학자들은 예수님보다 조금이라도 앞 선 시대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은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입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하는 대로 우리가 남을 대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그들의 가르침은 매우 소극적이고 부정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셨듯이 우리도 먼저 찾아가야 합니다. 먼저 손 내밀고,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다음은, 32절-36입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주느니라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32-36).
    이 말씀은 한 마디로 이방인처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고, 선대하는 자만 선대하고 돌려받기를 바라고 꾸어주는 것은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상을 받지 못하니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과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고, 선대하는 사람만 선대하고, 대가를 바라고 선을 베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 사람처럼 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35절 때문입니다.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꾸어주면 큰 상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상이 있습니다. 장차 말씀에 순종한 자가 받을 상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그 상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수고해서 얻는 상은 모두 사라집니다. 그런데 그런 상을 얻기 위해 얼마나 수고합니까? 하물며 장차 우리가 받을 영원한 상을 위해 수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말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행위와 구원은 무관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이것은 강조용법입니다. 우리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찮은 자들이 아닙니다. 정말 대단한 자들입니다. 마귀의 자녀처럼 자기를 사랑하고 선대하는 자만 사랑하지 말고 원수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다음은 37절입니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우리가 무엇을 심던지 그대로 거두기 때문에 비판과 정죄를 하지 말고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말씀을 어떤 상황에서 하셨습니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실 때에 하셨습니다. 언뜻 보면 비판과 정죄를 하지 않은 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비판과 정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늘 용서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상대방을 함부로 정죄하거나 비판하지 않습니다. 혹 우리가 누군가를 자꾸 비판하고 있다면 우리 안에 사랑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지 않고 마귀가 통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런 마음을 고쳐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다음은 38절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이 말씀은 한마디로 우리가 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준 것만 도로 주시지 않고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안겨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준 것만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요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심은 것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큰 것을 주십니다. 저는 지난번 제자훈련세미나에 참석한 목회자들 중에 양육부흥회를 요청한 교회에 가서 양육부흥회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강사비도 받지 않고 때로는 훈련교재도 그냥 줍니다. 그리고 저에게 상담하러 오는 목사님들에게 식사대접을 합니다. 그래서 요즘 자주 듣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 있습니까?” “제가 대접해야 하는데 어떻게 목사님이 대접하십니까?” 이런 말을 들을 때 제가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선을 베푸는 손보다 저의 선행을 갚아주시는 하나님의 손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보여주신 삶을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예수께서 원수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셨듯이, 우리도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원수를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그리스도인의 뱃지이고 삶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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