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주님을 사랑할거야 요21장 15-19 201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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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주님을 사랑할거야 요21장 15-19 2012.7.12018-12-03T19:22:23+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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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축구 대표팀 선수들이 축구시합에서 승리해서 기분을 전환한다고 배를 타고 물놀이를 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푹풍우가 몰려와서 배가 막 뒤집어지려는 상황이었습니다. 절대절명의 위기 순간에 마귀가 나타나서 자기의 제안을 들어주면 폭풍우를 멈추게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워낙 급한 상황인지라 그의 요구조건대로 하겠다고 했습니다. 마귀의 요구 조건은 그들의 이름을 다 <사>로 바꾸고 그 이름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일단 살아야겠기에 그 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자 폭풍우는 잠잠해졌고 살아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안정환이 말했습니다. “<안사>? 아니 나는 물건은 하나도 못 산다는 말이야? 황선홍이 말했습니다. <황사>? 아니 난 중국 바람같이 살아야 해?” 이을용이 말했습니다. “<이사>? 나는 맨날 이사만 다녀야하나?” 설기현이 말했습니다. 설사? 난 날마다 설사만 해야 돼? 이 이야기는 웃자고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야기에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마귀와는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주간 어떻게 사셨습니까?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기셨습니까? 패배하셨습니까? 이기신 분도 있을 것이고 실패하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앉아 계시다는 것은 모두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기셨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그러나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셔서 이 자리에 나오신 것으로 만족하지 마시고 말씀을 받는 일에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일날 설교 시간에만 승리하지 마시고 날마다 삶의 전 영역에서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한 마디로 예수께서 걸어가신 발자취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기 힘든 세상에서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겠다고 결심하지만 도중에 시험에 들어 그만 두는 사람이 부지기수인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읽어드린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험악한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고 끝까지 주님을 따라갈 수 있는지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부활하신 후 곧바로 승천하시지 않고 40일간을 이 세상에 계시면서 공포와 두려움 가운데 떨고 있는 제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시며 그들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믿음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로 그런 상황에서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아침 식사를 하신 후, 예수께서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는 가운데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왜 예수께서 베드로라는 이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라고 부르시지 않고 시몬이라고 부르셨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께서 시몬의 이름을 베드로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로 가실 때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셨을 때에 시몬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자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내게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시며 그 때부터 그의 이름을 ‘시몬’에서 ‘베드로’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 사이에서도 시몬이 아니라 베드로라고 불려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새로 지어주신 이름을 부르시지 않고 옛 이름으로 그를 부르셨느냐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이나 부르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베드로의 이름을 옛 이름인 시몬으로 부른 데에는 뭔가 주님께서 의도하신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시몬’이라는 이름은 그가 예수를 만나기전에 가지고 있었던 이름입니다. 시몬은 ‘하나님께서 들으심’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식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그가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기 전에 가졌던 옛 이름으로 옛 사람을 지칭하는 대명사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이름으로 그를 부르시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던 것은 비록 옛 사람의 모습을 갖고 있을지라도 여전히 예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혹 우리가 옛사람의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라도 여전히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거듭난 자답게 살아야지만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하고 넘어지고 죄 가운데 살아도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짓거나 믿음으로 살지 않는 경우는 주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습 그대로 주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죄 가운데 있어도 주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혹 넘어졌을지라도 넘어진 자리에서 주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은 놀랍게도 실패한 자리에서 사람들이 주님을 찾다가 만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의 자리에서, 질병의 자리에서, 귀신들린 자리에서, 죽음의 자리에서 주님을 만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주님 보시기에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부끄럽거나 수치스러운 일을 하고 있습니까? 그렇다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부끄럽거나 수치스러운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 사랑하는 일을 멈추면 더욱 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시몬에게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까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예수께서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사실을 회상시켜 주시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사실 예수께서 시몬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의 상황을 살펴보면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상황과 거의 흡사합니다. 첫째로, 베드로가 예수를 모른다고 3번이나 부인했는데 예수께서도 3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둘째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때에 숯불이 옆에 있었는데 예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에도 숯불이 옆에 있었습니다. 셋째로, 베드로가 사람들이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했는데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숯불 곁에서 네가 나를 이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세 번이나 하셨을 때에 과거에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신한 것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그의 잘못된 과거를 회상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찾아가신 것은 이미 그들의 죄를 다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한 번 용서하신 것에 대하여는 더 이상 기억도 하지 않으시고 책망도 하지 않으십니다. 용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처럼 생각이 나면 또 말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회개한 것에 대해서는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기억지도 않으시고 눈보다도 더 희게 하십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베드로의 잘못을 회상시키기 위해서 3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정신과 크게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여러 차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까요? 그것은 예수께서 베드로와 나눈 대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실 때마다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라고 하시고 그리고 “나를 따르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주께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고 주님을 끝까지 따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고 주의 일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주님의 일을 온전히 할 수 없고, 주님을 끝까지 따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베드로를 통하여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을 열심히 좇아다녔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은 가지 못하는 곳까지 따라가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실 때에도 베드로는 데리고 가셨습니다. 또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올라가실 때에도 다른 사람은 멀리서 기도하였지만 베드로는 예수님 가까이에서 기도하였습니다. 그토록 열심히 주님을 좇았지만 예수께서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심문을 받자 예수를 모른다고 배신을 하였습니다. 단지 배신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을 하였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을 저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그렇지 감히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예수를 열심히 좇아다녔던 베드로가 어떻게 예수님을 배신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좇아다녔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그토록 열심히 좇아 다닌 것은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을 이용하여 명예와 권력을 얻으려는 욕심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따르지만 베드로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끝까지 주님을 좇을 수 없습니다. 왜나하면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랑하는 대상을 위하여 희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희생을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왜 자신은 잘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해도 자식들은 잘 먹이고 입히려고 애를 씁니까?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 가기 위해서는 희생도 해야 하고 고난도 참아야 합니다. 우리가 참지 못하고 희생을 하지 않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좇아가는 길은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항상 순탄한 것만이 아닙니다. 때로는 가시밭길도 나오고 험한 준령도 만나고 무서운 풍파도 만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면 힘들고 어려워도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섬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이런저런 문제로 어려움을 당해도 끝까지 교회를 섬길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중도에 포기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변함없이 예수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은혜가 있을찌어다”(엡 6:24)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바울은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전 16:2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지 저주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후 ‘내 양을 치라’는 사명을 맡기시면서 자신을 따르라고 하시면서 베드로에게 한 가지 예언을 하셨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앞으로는 베드로의 마음대로 살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따르는 자는 자기 멋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무시를 당해도 핍박을 당해도 고난을 당해도 주께서 주신 사명의 길을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잘살게 하셔도 사명의 길을 가야하고, 가난하게 살게 하셔도 가야하고, 건강하게 하셔도 가야하고 병들게 하셔도 가야 합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값주고 사셨기 때문에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자는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베드로는 한 때 주님을 모른다고 배신했지만 주님을 사랑하겠다고 마음을 먹고서는 온전히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순교할 때에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달릴 수 있겠냐고 하면서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순교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순교하자 주님께서 그를 어떻게 만드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의 이름을 존귀하게 해주셨습니다. 몇 해 전 교황이 죽었습니다. 그러자 전 세계의 매스컴이 그의 장례식을 방영했습니다. 장례식날 100만 명이 참여했다고 합니다. 아마 인류 역사상 그토록 많은 사람이 죽음을 애도한 것은 처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천주교에서 초대교황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아십니까? 베드로입니다. 만일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한 것으로 그의 생애를 마쳤다면 그 역시 빌라도처럼 영원히 사람들에게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사랑하며 따랐기에 그토록 영광스러운 이름이 된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시면서 자신을 따르라고 하시기전 네 직분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네 나이가 몇이냐고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얼마나 나를 믿었느냐고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데 필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때에 끝까지 주님을 따를 수 있고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주시는 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겠다고 결단하십시오. 베드로처럼 순교는 하지 못해도 생활 속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결단하십시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하여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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