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하면 다투고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누가복음 22장 24-34절. 2018.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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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하면 다투고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누가복음 22장 24-34절. 2018.5.272018-12-03T23:48:21+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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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은 제자들 중에서 누가 크냐는 논쟁으로 시작해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는 예언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 듯 보기에는 논리적으로 일관성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면 한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교만하면 서로 다투게 되고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첫 절인 24절을 다시 읽습니다.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여기서 ‘그들’은 제자들이기 때문에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크냐는 서열 논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서로 다툰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이전에도 또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9장 46절을 보십시오.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이를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그들 간에 종종 서열 논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두 사람만 모이면 서로 누가 큰지를 가지고 다툽니다. 가정에서 부부간에도 다투는 것도, 형제간에 다투는 것도 누가 더 크냐는 싸움입니다. 또 교회에서 목회자와 성도 간에 또는 성도와 성도 간에 불화가 일어나는 것도 누가 더 크냐는 싸움입니다. 또 직장에서 상사와 부하 간에 다투는 것도 좀 더 깊이 들어가면 ‘누가 크냐’는 것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어떤 상황에서 서열 논쟁을 했는지 아십니까? 첫 번째 서열 논쟁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9장 43-44절을 읽겠습니다.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니라 그들이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놀랍게 여길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 하시되.” 한마디로 예수께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신 후였습니다. 다음은 두 번째 서열 논쟁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만찬을 하시던 중 떡을 떼어주시며 이 떡은 나의 몸이라고 하시고, 잔을 주시면서 이 잔은 나의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성찬식을 제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성찬식을 제정하신 것은 그의 죽음을 영원히 기억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성찬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관련된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두 번 모두 예수께서 죽으신다는 말을 듣고서 서열 논쟁을 한 것입니다.
    왜 예수께서 죽음을 예고하실 때에 제자들은 누가 큰지에 대한 서열 논쟁을 벌였을까요? 그것은 예수께서 죽으시고 난 후 공동체를 이끌어 가야 할 리더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사후에 누가 리더십을 가질 것인지를 두고 서열 논쟁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때에 누가 가장 먼저 예수님의 지도권을 이어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을까요? 그것은 당연히 베드로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께서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실 때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여 주님을 가장 기쁘시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 누가 예수님의 리더십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했을까요? 사도 요한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예수님께 가장 많이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제자들도 나름대로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자기가 공동체의 리더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리는 하나인데 그 자리에 앉으려는 자들은 많기 때문에 서로 누가 크냐고 논쟁을 벌였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서열 논쟁에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첫 번째 서열 논쟁을 보시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9장 47-48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자신을 작은 자로 여기는 자가 가장 큰 자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서열 논쟁을 보시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2장 25-27절을 읽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세상에서는 사람들을 다스리고 자리에 앉아서 음식을 대접받는 사람을 큰 자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오히려 남을 섬기는 사람이 큰 자라는 것입니다. 즉 큰 자와 작은 자에 대한 개념이 이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와 정반대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가치와 전혀 다릅니다. 죽어야 살고, 낮아져야 높아지고, 섬겨야 큰 자가 됩니다. 즉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 세상과 정 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어제 보내 루마니아에서 보내 온 큐티 반응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늘 내 생각과 감정조차도 내려놓는 것이 요구되기에 정말 어렵습니다. 한 번만 내려놔서 되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상할 때나 내키지 않을 때도 그렇게 해야 하니 정말 거친 물살을 헤치는 것보다 힘이 듭니다. 주여, 도우소서.” 그렇습니다. 참 된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마 7:14)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려면 많이 가지고 배울수록 더욱 더 낮아져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가장 큰 자가 되려면 섬겨야 한다고 하시면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28-30절을 읽습니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이 말씀은 한 마디로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삼 년간 함께했기 때문에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스리는 자리에 앉게 하시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당하신 모든 시험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께서 본래 하나님이신데 이 세상에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정도로 낮아지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것이 예수께서 당하신 시험일까요? 무엇보다도 존재 방식을 바꾸는 것 자체가 고통이고, 자신이 피조한 자들에 의해 의한 핍박을 받으면서 참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대통령인데 무시를 당하고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모든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참으시지 않았다면 시험을 이기실 수 없습니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시험을 참아야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꾹 참아야 합니다. 상을 뒤엎고 싶어도 참고 견뎌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신이 당한 시험에 제자들이 항상 함께 했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열두 지파를 다스리도록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정말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험당하실 때에 항상 함께 했습니까? 우리가 알다시피 제자들은 항상 예수님의 시험에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기회만 나면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움박질이나 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장차 제자들이 그렇게 될 것을 믿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은 그들이 자리를 두고 서로 다투고 낮아지는 시험에 실패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을 믿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지금의 상태만 보시고 우리를 평가하시지 않습니다. 장차 성숙해져서 주님의 자녀로 온전히 세워질 것을 미리 내다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이렇게 믿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주님을 더욱 더 겸손히 섬겨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더처치가 국내 뿐 아니라 전 세계를 두루 다니며 이토록 크게 사역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대단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이 일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고 맡겨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덧붙인 말씀이 무엇입니까? 31-32절입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면 한 가지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시몬아, 시몬아” 라고 부르시면서 사탄이 ‘너’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다고 말하지 않고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예수께서 베드로를 부르시고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마귀가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는 대상은 오직 베드로뿐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탄은 앞장서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만 공격하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도 공격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수제자가 아니었던 가룟 유다가 마귀의 공격을 받아 가장 비참한 인생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마귀의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후 5:8).
    그런데 예수께서 두 번이나 시몬을 부르시고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여기서 ‘밀 까부르다’는 것은 밀을 체로 쳐서 알곡과 쭉정이로 가려내는 것인데, 사탄이 그들을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다는 것은 사탄이 그들을 시험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요청했다는 말입니다. 이를 통해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마귀는 하나님의 허락 없이 우리를 공격해서 넘어뜨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 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당할 만큼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피할 길을 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사탄이 베드로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지만 예수께서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셨기 때문에 장차 돌이킨 후 형제들을 굳게 하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면 상대방이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안수로 병 고치는 내과의사’라는 책(규장)이 있습니다. 저자는 안우성 이라는 의사입니다. 그가 한국에서 의사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주일 아침 7시 경, 교회로부터 한 성도의 집으로 빨리 오라는 전화를 받고 갔는데 집 주인인 듯한 여자 한 사람이 방에 누워 있었습니다. 한 달 전부터 정신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는데, 그날 아침에는 아예 일어나지도 않을뿐더러 반응이 전혀 없었습니다. 의사가 청진기를 대보니 심장은 뛰는데 꼼짝 않고 가만히 누워 있었습니다. 이에 곁에 있던 목사님이 찬송가 585장을 부르자고 했습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한참 동안 찬송을 부르는데 죽은 듯이 누워 있던 여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마치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찬송을 그만 부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목사가 호통을 치며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물러가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목사를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칼은 썩었다.” 옆에 있던 집사가 “나사렛 이름으로 물러가라”고 외치자 그에게는 “그 칼로는 사과나 깎아라”고 빈정거렸습니다. 이때 그 의사도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물러가라.” 그러자 여자는 그를 향해 이렇게 호통을 쳤습니다. “그것도 칼이라고 들고 다니느냐?” 그 후 그는 사탄에게 당한 모멸감을 지울 수 없어 수없는 번민의 시간을 보내던 중 에베소서 6장 18절의 말씀을 읽다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그 후로 기도에 힘썼고 환자를 기도로 고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신 것처럼 우리도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하되 특별히 강혁진 집사님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33-34절을 살피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이렇게 말할 때에 당시 다른 제자들은 그의 용맹스러움을 부러워했을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가 그렇게 고백한 것은 위선이 아니라 진심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예수께서 체포되셨을 때에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뜰까지 좇아간 것을 보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이처럼 베드로가 끝까지 주님과 함께 하겠다고 맹세했지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을 통하여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자신의 각오와 결단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결심하고 작정한다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우리가 결심한 대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셔야 합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1-2). 우리가 결단하고 열심히 수고한다고 그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성취되게 하셔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서로 누가 크냐는 논쟁은 교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교만하면 다투게 되고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므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반면에 겸손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복된 삶을 살아갑니다. 더 낮아지기로 결단합시다.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므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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