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를 다시 해석하다 눅18:1-8 2017.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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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를 다시 해석하다 눅18:1-8 2017.10.12018-12-03T23:33:51+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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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읽은 본문은 일명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이 비유가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다른 비유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비유’(눅 15:1-7),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의 비유’(눅 15:8-10),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비유’(눅 15:11-32)등을 비롯하여 22개나 되는 비유가 등장하는데, 유독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는 결론이 서론에 나와 있습니다. 소위 말해서 다른 비유들은 미괄식인데 반하여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는 두괄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유를 다 읽기 전에 예수께서 이 비유를 왜 말씀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렇게 결론만 말씀하시면 되는데, 굳이 예수께서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실 이유가 있냐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얼마든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얘들아, 기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낙망하지 말고 해야 하는 거야.” 그런데 왜 예수께서 ‘과부와 재판장’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켜 비유라는 문학적 기법을 통하여 말씀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면 기도하다가 낙망하여 그만 둘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를 통하여 낙망하지 않고 항상 기도할 수 있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과부가 ‘재판장’에게 찾아가서 원한을 풀어달라고 간청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전에 과부가 ‘재판장’을 찾아가서 자기의 원한을 해결해달라고 한 것에 조금도 의문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갑자기 이런 질문이 들었습니다. “가상의 이야기라 예수께서 얼마든지 과부가 돈 많은 사람이나 정치인에게 찾아가서 자기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간청했다고 비유를 드실 수 있는데, 왜 과부에게 찾아가서 간청을 했다고 하셨지?” 여러분은 왜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합니까? 저의 생각이 이렇습니다. “재벌이나 정치인은 과부의 요청에 답해야 할 의무가 없지만 재판장은 과부의 요청에 답을 해야 할 법적 의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재판장이 과부의 요청에 답을 해야 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비천한 우리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셔야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 삼아주셨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으면 자녀를 양육해야 할 의무가 있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셔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우습게 알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지 않은 사람도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구걸입니다. 기도는 특권이므로 당당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자녀들은 부모의 말에 순종하지 않으면서도 뭔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당당하게 요구합니다. 조금도 미안한 기색이 없이 달라고 합니다. 얼마나 뻔뻔스러운지 모릅니다. 제 딸이 바로 그렇습니다. 친구를 만날 때마다 꼭 이번만 도와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만으로 끝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죄를 짓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해주시는 것입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습니다. 자식이 매어달리면 부모는 손을 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이기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믿고 매달려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알고 그 권리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특권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롱에 넣어두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특권은 사용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을 온전히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고 간단히 말씀하실 수 있지만 이렇게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들 들어 말씀하신 것은 기도가 택함받은 자의 특권이라는 사실을 온전히 깨닫고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지 않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만이 갖고 있는 특권입니다. 이 특권은 사용할 때만 보호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하나님께 모든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간청할 권리가 있음을 알고 당당히 하나님께 나아가 간구하기시 바랍니다.

    둘째로, 과부가 ‘자주’ 재판장을 찾아 가서 원한을 풀어달라고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자주’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과부가 재판장을 한 두 번이 아니라 ‘자주’ 찾아갔더니 원한을 풀어주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재판장이 과부의 원한을 풀어준 것은 단지 그녀의 처지가 불쌍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주’ 찾아가서 하소연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단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녀라는 이유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각종 문제를 알아서 해결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자주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간청해야 응답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자주’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7절을 읽겠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여기서 우리는 ‘자주’가 무엇으로 바뀌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까? ‘그 밤낮’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주’는 빈도를 뜻하고 ‘밤낮’은 계속성을 뜻합니다(그 밤낮은 번역이 잘못되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입니다. 즉 하나님께 밤낮으로 기도하는 자에게 응답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즉 기도는 계속해야 응답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1849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쏟아져 나와 그 해를 ‘황금의 해’라고 부릅니다. 어떤 청년이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캘리포니아의 금광을 사서 열심히 채굴했습니다. 그러나 금이 나오질 않자 금광을 다시 팔아버렸습니다. 그런데 새로 인수한 사람이 1M 쯤 파고들어 가자 노다지가 나왔습니다. 금광을 팔아치운 청년은 이 일을 통하여 황금보다 귀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보험회사의 영업사원으로 들어가 ‘1M 철학’을 실천했습니다. 고객을 대할 때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지금까지 기울인 모든 수고가 헛것이 된다는 것을 상기하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 보험 가입을 성사시켰습니다. 그랬더니 보험 왕이 되었습니다. ‘1M 철학’이 결국 그를 거부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기도에도 ‘1M 철학’이 필요합니다. 응답받을 때까지 기도하겠는 굳은 의지로 하나님께 매어달려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몇 해 전, 예진이를 통하여 기도는 계속해야 한다는 것을 체험한 적이 있습니다. 예진이가 고3 때였습니다. 당시 예진이는 제가 사용했던 노트북을 물려받아 사용하고 있었는데, 성능이 약하다며 제가 사용하고 있던 노트북을 자기에게 주고 나보고는 새 것을 사라고 졸라댔습니다. 그런데 저는 고3학생에게 노트북이 꼭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단호히 말했습니다. 그런데 자꾸 졸라대자 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딸에게 제 노트북을 주기로 하고 새로 제 것을 사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제가 그렇게 마음을 먹은 후로는 사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마음이 바뀐 후에 단 한 번이라도 제 것을 달라고 했다면 제 노트북은 딸의 몫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한 번을 하지 않아 지금까지도 노트북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제가 그 일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기도는 응답 받을 때까지 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중도에 기도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을 아셨기에 단지 항상 낙망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께서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라고 말씀하신 후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래 참으시겠느냐”는 반어법입니다. 즉 오래 참으시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래 참으시지 않는다는 것’을 8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속히’ 응답해주십니다. ‘기도는 곧 응답이다’라는 말은 이처럼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곧바로 응답해주시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라’고만 말씀하시지 않고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를 드시고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은 과부가 계속해서 재판장을 찾아가서 번거롭게 하자 원한을 해결했듯이, 우리도 낙심하지 않고 계속해서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속히 응답해주십니다.
    그런데 왜 이런 사실을 믿으면서도 기도하다가 종종 중도에 포기할까요? 그것은 ‘응답의 때’를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가 응답의 때를 정해놓고 그 때까지 응답이 없으면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도는 우리가 하지만 응답은 하나님께서 하시므로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제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믿고 구한 것은 다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역 비전인‘2030123007000’(2030년까지 12명의 단독선교사와 300명의 현지목회자와 7000명의 평신도사역자를 파송하겠다는 것)이 이뤄지려면 적어도 매달 10억원이 더 들어도 우리가 계속해서 기도하면 반드시 성취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방법으로 응답해주시기 때문에 낙심하지 말고 응답을 받을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넷째로, 예수께서 끝으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8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살펴보면 ‘그러나’ 전과 후의 내용이 전혀 다릅니다. ‘그러나’ 전에서는 우리가 기도하면 속히 원한을 풀어주시겠다는 것이고, ‘그러나’ 후에서는 마지막 때에 세상에서 그런 믿음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즉 그러나 전에는 기도의 응답에 대해서 후에는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한마디로 주님께서 속히 기도에 응답해주시지만 마지막때에는 이것을 믿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에는 이 말씀이 그렇게 마음에 깊이 와 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만 해도 기도하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도원은 기도원대로 교회는 교회대로 기도하는 사람들로 차고 넘쳤습니다. 저는 성령충만함 가운데 거듭났기 때문에 새신자때부터 일주일에 서너 번씩 삼각산으로 기도를 하러 다녔습니다. 삼각산을 오르는 입구가 여러 군데 있었지만 평창동 예능교회(과거에는 연예인교회) 옆길을 주로 이용하였습니다. 당시 저녁 11시 경에 삼각산을 올라갔는데 그 시간에 삼각산에 가서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지 마치 영화가 끝나면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도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기도원도 교회도 점점 기도의 소리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주님께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씀하신 대로 사람들이 믿음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왜 마지막이 갈수록 점점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이런 현상이 빚어질까요? 그것은 무엇보다 마귀가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점점 믿음을 잃어가고 있는 것에 대해 전혀 책임이 없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에 대해 100% 책임을 져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점점 믿음을 잃고 기도하지 않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돈을 구원자로 믿고 그것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막강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할 만큼 막강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을 구원자로 믿고 좇아가면 가졌던 믿음을 다 잃게 되고, 반면에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따르면 믿음을 잃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눈에 보이시지 않지만 그분을 좇으면 구원을 경험하게 되고 믿음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이런 사실을 알았기에 사도들이 집에 있든지 성전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고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D3가 붙잡고 있는 세 가지 핵심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 사도행전 5장 42절, 에베소서 4:11-12절입니다. 특별히 제가 가는 곳마다 사도행전 5장 42절이 성취되는 교회를 만들려고 하는 것은 사도들이 이미 구원받은 자들에게 날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전도하는 훈련을 하자 그들이 나가서 제자 삼으라는 명령에 순종했듯이, 지금도 예수께서 구원자이심을 정말 믿으면 그런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씀하신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신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에게 경고하신 것입니다. 믿음과 기도는 비례합니다. 기도는 열쇠이고 믿음은 그것을 돌리는 손이기 때문에 믿음이 있는 자만이 끝까지 주님께 매달려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정말 구원자이심을 믿는다면 믿음으로 기도하는 일에 올인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힘없는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의 싸움은 힘없는 과부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어떻게 힘없는 과부가 이겼습니까? 그의 힘으로 이겼습니까? 아닙니다. 반드시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끝까지 재판관에게 매어 달렸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많이 못 배우고, 가진 것이 없어도 믿음으로 하나님께 끝까지 기도하면 인생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항상 낙망하지 말고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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