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중에도 기뻐할 이유 있습니다. 합3:16-19 2013.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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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중에도 기뻐할 이유 있습니다. 합3:16-19 2013.6.302018-12-03T20:33:06+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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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벤허 십계등으로 1950-60년대 최고 배우로 손꼽혔던 미국의 영화배우가 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찰턴 헤스턴’입니다. 어느 날 기자가 십계를 촬영한 후, ‘찰턴 헤스턴’에게 물었습니다. “모세와 같은 성인의 역할을 하면 배우 자신도 삶에 어떤 변화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헤스턴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시내산 흙을 밟고 올라갔던 사람이 어떻게 달라지지 아니하고 내려올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비록 연기라 할지라도 성자의 삶을 재현하면 삶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가 이렇게 매주마다 예배를 통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는데 어찌 삶에 변화가 없겠습니까? 오늘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주님을 새롭게 만나시고 삶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에게 한 가지 묻겠습니다. “정말,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지난 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구원은 우리의 행함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음으로 받습니다. 구원을 받는데는 오직 믿음만 필요하지 우리의 선행과 노력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믿음으로 받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쉽게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무엇을 가지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려고 하는지를 아십니까? 자신들보다 착하게 살거나 어려운 자들을 돕는 것을 보고서 판단하려고 합니다. 사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보다는 훨씬 착하게 살고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통계청에 의하면 노인복지에 가장 많이 봉사를 하는 단체 중 개신교가 73%, 천주교가 20%, 불교가 5%, 기타가 2%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비그리스도인들보다 훨씬 더 많이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2007년, 태안 앞바다에 기름이 유출해서 국가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당시 기름을 제거하기 위해 순수 자원봉사자만 16만 7671명이 참여했습니다. 그 중에서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그 사건을 총괄한 기관이 대전검찰청 서산지청이었는데 당시 서산지청장이 제 절친인 박충근 검사였습니다. 그는 한류스타 권상우를 협박한 혐의로 서방파 두목 김태촌을 구속시킨 검사로도 유명합니다. 그 친구가 명성교회 집사인데 마침 한국교회봉사단장인 김삼환목사님이 직접 봉사팀을 이끌고 현장에 왔기 때문에 자기가 그 사건에 대해 보고했다고 하면서 저에게 봉사자중 2/3가 기독교인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선행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더 쉽게 알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쁨’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고난을 당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고난을 대하는 태도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은 전혀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고난을 통하여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을 믿기 때문에 기뻐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눈앞에 있는 고난만 바라보고 혼자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영국에는 왕족들이 사는 성이 있는데 그 성안에 여왕이 머물고 있으면 깃발을 올려서 휘날리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깃발이 보이면 “아, 여왕이 성에 계시는구나!” 하고 알아챈다고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아 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신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는지 아십니까?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쁨은 그리스도의 배지(badge)입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기쁨이란 하나의 깃발과 같다.” 그렇습니다. 기쁨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가 그리스도인인줄을 알게 하는 깃발입니다. 그리고 스스로도 자신이 기뻐하는 것을 통하여 그리스도인 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박국 선지자가 유다왕국이 바벨론에게 패망을 당하기 전에 하나님과 대화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박국이 하나님과 대화를 할 당시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본문 16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무슨 말입니까? 하박국은 바벨론이 쳐 들어와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서 뼛속까지 떨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국가적으로 존립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개인적으로는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밭에 먹을 것이 없고,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다”고 말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박국이 그토록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에 외친 말이 무엇입니까?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8). 한 마디로 그는 기뻐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잘 되면 기뻐하고 잘 안 되면 좌절하고 낙심합니다. 그래서 사업이 잘되거나 승진하거나 시험에 합격하거나 건강하면 기뻐하지만 사업에 실패하거나 시험에 낙방하거나 승진이 안 되거나 질병에 걸리면 절망합니다. 그런데 하박국은 곧 나라가 바벨론에게 패망을 당할 상황에 처하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기뻐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어떻게 그가 그런 상황에서도 기뻐한다고 고백할 수 있었을까요? 18절을 다시 한 번 일어보시겠습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무엇으로 말미암아 기뻐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전쟁의 공포와 절대 빈곤의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구원의 하나님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과 기쁨은 정비례합니다. 구원 받은 자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구원과 상관없는 기쁨은 그리스도인의 기쁨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최악의 상황에서도 기뻐하기 위해서는 ‘구원’에 대하여 좀 더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구원은 ‘건짐을 받는다’는 뜻인데,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위치적인 구원’입니다. 성경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요 1:12)고 말씀하고 있듯이,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 우리의 영적인 신분은 무엇이었습니까? 마귀의 자녀입니다. 즉 예수를 믿으면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는 것을 ‘위치적인 구원’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위치적인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이 확신이 없다면 여러분이 누리는 기쁨은 이 세상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기쁨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이 있다면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상놈에서 양반으로 신분이 바뀌어도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기뻐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에게는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죄송합니다만 여러분이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기쁨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면 아직 ‘위치적인 구원’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이 기쁨은 복음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은 자만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정말 이 기쁨을 맛보기 원하신다면 예수께서 여러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이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경험적인 구원’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음으로 구원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법적인 관계에 있음을 뜻합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낳으면 법적으로 양육을 책임져야 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기 때문에 우리를 책임지셔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임지실 의무가 있다는 말은 다른 말로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여 양육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 즉 양육청구권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양육청구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양육청구권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아십니까? 기도로 사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해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이시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지만 기도하므로 응답을 경험하면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 50:15)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환난에서 건져주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기도하여 각종 올무에서 건짐 받는 것을 ‘경험적인 구원’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당연히 구원을 경험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경험적인 구원’을 받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경험적인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기도로 양육청구권을 아직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약 4:2)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믿으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는데 그분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말이 되겠습니까? 7월 8일부터 5일간 특별새벽기도회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금번 특새의 주제는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라’입니다. 금번에는 특별히 직장에 빨리 출근하시는 분들을 고려하여 기존보다 30분 앞당겨서 합니다. 금번 기도회에 참석하셔서 간절히 기도하므로 하나님의 구원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종말적 구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에 구원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심판은 종말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때에 얻는 구원을 ‘종말적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미 얻은 위치적인 구원을 삶속에서 체험하는 경험적 구원을 맛보게 하시다가 결국은 천국으로 인도하여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딤후 4:18)라고 말한 것입니다. 항상 이 세 가지 구원의 확신이 충만할 때에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구원을 인해서만 기뻐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기뻐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여호와가 자신의 힘이 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19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시겠습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하나님께서 영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자신의 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박국은 하나님을 자신의 힘이라고 고백하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힘으로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어떤 상황을 만났을지라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난에서 건져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가장 큰 힘으로 믿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세상의 돈과 권력과 명예입니까? 하나님을 자신의 힘으로 삼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어도 실제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지도 않고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답게 기쁨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자신의 힘으로 믿는지 점검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자신의 힘으로 삼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지를 알면 알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 18:1)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돈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돈을 가장 큰 힘으로 삼고, 명예를 가장 사랑하고 기뻐하는 사람은 명예를 가장 큰 힘으로 삼고, 권력을 가장 사랑하고 기뻐하는 사람은 권력을 가장 큰 자신의 힘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쉽게 하나님을 자신의 힘으로 믿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여호와는 여러분의 힘입니다”라고 말을 할 때에 “맞아, 하나님이 나의 힘이야”라고 느껴지는 분은 여호와를 자신의 힘으로 믿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이 말을 들어도 아무런 느낌이 없으신 분은 아직 하나님을 자신의 힘으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호와가 여러분의 힘입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 힘이 샘솟듯 합니까? 아니면 아무런 느낌이 없으십니까? 하박국처럼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를 찬양합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장차 자신을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19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십시오.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사슴은 주로 높은 곳을 다닙니다. 왜냐하면 그곳이 안전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사슴은 다른 맹수들에게서 자기 몸을 지키기에는 턱 없이 연약함을 알고 있기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높은 곳으로 다닙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슴과 같이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비록 잠시 동안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고 멸시와 조롱을 당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안전한 곳에 거하게 하십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금은 비록 외세의 침입을 받고, 물질적으로 절대적 빈곤에 처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장차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소망에는 크게 두 가지 소망이 있습니다. ‘죽은 소망’이 있는가 하면 ‘산 소망’이 있습니다. 죽은 소망은 이 세상 것들에 대해 가지는 소망이고, 산 소망은 하나님을 향해서 가지는 소망입니다. 죽은 소망이나 산 소망이나 다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그러나 죽은 소망은 그 기쁨이 찰나적입니다. 예를 들어, 병중에 있는 사람이 곧 나을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면 마음이 기쁩니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가 엄습해 오면 기쁨이 깨어집니다. 그러나 산 소망을 가지면 상황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는 것이 가장 큰 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우리를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오늘 없다고 불평하고 낙심하고 좌절하지 말고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는 주님만을 바라보고 기뻐해야 합니다. 한나를 보십시오. 남편 엘가나에게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아이를 낳지 못하자 엘가나의 다른 부인이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합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습니다. 그래도 아무런 소용이 없자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께서 시대적으로 크게 쓰임을 받은 사무엘을 낳게 하심으로 기쁨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망을 두는 사람은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종종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알라스카를 구입하는 것과 같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미국의 앤드루 존슨 대통령이 제정 러시아로부터 아무데도 쓸모없게 보이는 얼음덩어리인 알라스카를 사들였습니다. 그러자 미 의회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온갖 질책과 공격을 대통령에게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알래스카가 어떤 땅입니까? 미국 본토의 5분의 1에 해당할만큼 큰 땅덩어리로 그곳에 황금과 백금광산이 있고, 풍부한 어장이 있고, 우거진 산림이 있고, 엄청난 석유 매장량 있어 ‘황금박스’로 불리고 있습니다. 당장 눈에는 안 좋은 것 같이 보일 수 있지만 나주에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최고가 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을 자신의 힘으로 삼고, 장차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실 것을 바라보고 기뻐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람마다 살기가 힘들다고 아우성입니다. 소망과 기쁨을 잃고 절망과 좌절가운데 사는 자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난 중에도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아 저주와 심판과 지옥의 법에서 영원히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삶속에서 날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장차 천국에 입성하여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이 되실 뿐만 아니라 장차 우리를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고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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