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눅 20:19-26 2018.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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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눅 20:19-26 2018.1.212018-12-03T23:40:14+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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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특별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라는 말은 우리의 귀에 아주 익숙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이 ‘포도원 농부의 비유’라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말씀하시자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이 말씀이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하여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일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19절). 그런데 예수께서 포도원농부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회개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예수께서 포도원농부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성전정화도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려고 행동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회개는커녕 예수님을 대적하고 죽일 기회를 노렸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은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예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께서는 당시 메시아로 생각되어질만한 요소들을 많이 갖고 계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오병이어로 5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이신 것 등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백성들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하여 추종하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대적하고 심지어 죽일 생각까지 하였던 것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성경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메시아 대망 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메시아는 다윗과 같은 왕으로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왕궁에서 태어나시지 않고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이 멸시했던 지역인 나사렛에서 자라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미가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메시아이심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을 잘못 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도 잘못 보면 엄청나게 위험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소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다반사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거듭나기 전 바울이 아닙니까? 바울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박해한 것은 나름대로 성경에 정통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율법에 남다른 열심을 보였습니다. 그 남다른 열심히 그를 교만하게 만들었고 그 교만이 잘못된 고정관념으로 성경을 읽게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남보다 성경을 더 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의외로 성경을 잘못 보게 하는 선입견을 가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나름대로 정통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거짓 메시아로 생각하여 십자가에 죽였던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있는 비성경적인 선입관이 사라지고 건강하게 신앙생활을 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어떻게 했습니까? 20절입니다. “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20절).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공격하려다가 전략을 바꾸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앞에 직접 나서지 않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첩자들을 대신 내세워 예수님을 말을 책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고용한 첩자들은 아주 머리가 좋고 유능했습니다. 그들은 먼저 예수님의 환심을 사려고 예수님을 칭찬했습니다. 칭찬보다 상대방의 환심을 쉽게 사는 방법은 없습니다. 21절을 읽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지 않기 때문에 항상 진리만 말씀하신다고 추겨 세웠습니다. 얼마나 듣기에 좋은 말입니까? 그런데 이 말은 진짜 예수님을 칭찬하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것을 빌미로 책잡으려고 사탕발림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들이 책잡기 위해 던진 질문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22절). 이 질문은 아주 무서운 질문입니다. 예수께서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시든지 치명타를 입으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의 압제 하에 있었기 때문에 크게 3가지 명목으로 세금을 거두어들였습니다. 첫째는 인두세로서 14세부터 65세에 이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매년 인구조사를 할 때마다 하루치에 해당되는 임금을 세금으로 매겼습니다. 둘째는 관세로서 성문이나 항구를 통과하는 모든 물품에 대해 매겼는데, 자료에 따르면 상품가치의 2-5%정도에 해당되는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셋째는 토지의 소산에 대한 세금으로 곡식은 10분의 1, 과일은 5분의 1을 거두었습니다. 당시 그들이 내는 세금을 종합하면 개인당 수입의 3분의 1에 해당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토록 과도한 세금을 징수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로마의 조세제도에 크게 저항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세금을 거둬들이는 세리들을 증오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런 상황에서 예수께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다”고 대답하시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즉시 이 말을 유대백성들에게 전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향하여 분노하도록 하였을 것입니다. 반면에서 예수님께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대답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곧바로 로마총독에게 예수께서 백성들로 하여금 세금을 내지 않도록 선동했다고 해서 곧 체포를 당하게 되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예수님을 처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바로 이런 사실을 아시고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24절입니다.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24). 그러자 그들은 앞면에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흉상’이 그려져 있었고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티베리우스 케사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던 데나리온 하나를 내놓으면서 “가이사의 것이니이다”(24절)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곧바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25절)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에는 3가지 종류의 화폐가 통용되고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은 헬라제국에 뒤이어 건설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헬라의 화폐와 로마의 화폐를 병용해서 사용하고 있었고, 유대에서는 유대성전에서 발행하는 세겔이라는 성전화폐가 별도로 통용되었습니다. 당시 유대나라가 로마제국의 속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사회에서 세겔이라는 성전화폐가 통용되었던 것은 로마나 헬라의 화폐에는 왕이나 신들의 초상이 그려져 있어서 유대인들이 헬라화폐와 로마화폐로 헌금을 드리지 않아 이 문제로 자주 마찰이 일어나자 성전에서 사용할 화폐로 세겔을 발행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그들은 이 말씀을 아무런 거부감없이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성전에 내는 세금은 세겔로, 로마제국에 내는 세금은 데나리온으로 내는 것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탄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이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할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화폐의 통용은 곧 통치의 영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미국 달러를 가지면 어느 나라에서나 사용이 가능하지만 고대세계에서는 한 나라의 화폐는 그 나라의 통치 주권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만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당시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로마제국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동시에 로마제국에 소속된 백성이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제국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 분파에 따라 각기 다르게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두개파는 당시 로마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비교적 좋은 관계를 맺었고, 바리새파들은 로마제국을 원수로 생각하여 적대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갔습니다. 심지어 열심당원들은 앞장서서 로마제국에 불복종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오늘날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는 말을 잘못 해석하는 자들이 꽤 많습니다. 혹자는 이 말씀을 정치와 종교를 전혀 무관하게 생각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정치나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는 사람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신앙생활만 잘하면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와 하나님을 모두 인정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 나라 백성의 의무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의 의무를 모두 감당해야 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종교인 납세문제로 시끌벅적했습니다. 그간 종교인이 세금을 내지 않았던 것은 종교인의 소득을 노동의 대가인 근로소득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감사의 표시로 드리는 사례금으로 볼 것이냐에 대한 법 규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종교인들도 소득세의 개념으로 세금을 내기로 법이 통과되었기 때문에 법에 따라 세금을 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 속에는 또 다른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그들이 예수님께 와서 던진 질문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쳐야 한다”고 말씀만 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이 묻지도 않은 것에 대해 말씀을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이 묻지도 않은 것을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앞서 말씀을 드렸듯이 당시 유대인들은 소득의 30-40% 정도를 세금으로 가이사에게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어떻게라도 가이사에게 세금을 덜 낼 수 있는지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하나님께 어떻게 충성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쏟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바로 이것을 아시고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바치라”고만 말씀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일에 관심을 쏟다보면 상대적으로 하나님께 마음을 쏟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일에 모두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 중에 하나에만 열심을 다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속한 직장과 일터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균형있게 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가이사의 것에 집중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는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충돌을 일으킬 때도 있습니다. 먼저 가이사의 것에 집중할 경우입니다. 이때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가이사의 것’에 마음을 집중하는지를 생각하고 욕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이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모두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다음은 서로 충돌할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주일에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주일에 다른 일이 발생했을 경우입니다. 이럴 경우는 믿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것’은 언제나 ‘가이사의 것’에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26절입니다. “그들이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놀랍게 여겨 침묵하니라.” 그들이 판 함정 질문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는 것을 보고서는 놀랍게 여기고 침묵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침묵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의 말씀이 옳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예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셔도 듣지 않을 생각을 하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으려는 생각하고 듣는 사람은 상대방이 그 어떤 말을 해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도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주 선포되는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받고 결단을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행동에는 전혀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요? 우리가 말씀대로 살겠다고 생각하지 않고 말씀을 듣기 때문입니다. 그냥 설교시간이니까 말씀을 듣지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설교를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말씀 앞에서 더 이상 침묵하지 말고 행동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지만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은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기지만 침묵한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마음으로 결단하고 입으로 말하지 말고,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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