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룟 유다의 배신 예고를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눅22:21-23 2018.5.20

//가룟 유다의 배신 예고를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눅22:21-23 2018.5.20
가룟 유다의 배신 예고를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눅22:21-23 2018.5.202018-12-03T23:47:54+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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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예배 중 김종태 선교사의 사역보고가 있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짧게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 성찬과 관련해서 5가지 질문을 던지고 이에 답하는 형식으로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평소 가까이 지내는 자에 의해 팔려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가룟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4복음서 모두 가룟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과 다른 세 복음서는 이를 다르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성만찬을 마치신 후에 이를 말씀하신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반면, 마태(마 26:26-29)와 마가(14:17-25)와 요한(13:21-30)은 성만찬 중에 말씀하신 것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즉 다른 세 복음서 기자는 성만찬과 가룟 유다의 배신의 예고를 같이 다루고 있는 반면, 누가는 성만찬과 가룟 유다의 배신을 분리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왜 누가는 다른 세 복음서 기자와 달리 성만찬과 가룟 유다의 배신 예고를 별도로 다루었을까요? 그것은 가룟 유다가 주의 성찬과 무관한 자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한마디로 가룟 유다는 구원에서 제외된 자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예수께서 가룟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면서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이야기를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러나’는 앞의 내용과 상반되는 것을 말할 때 사용하는 접속사입니다. 즉 예수께서 바로 앞서 제자들에게 떡을 떼시며 잔을 나누신 것은 예수께서 그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상징적으로 말씀하신 것인데, ‘그러나’로 시작하시면서 가룟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신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가룟 유다와 무관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가룟 유다에게 더한 저주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주의 죽으심과 무관하다는 것은 죄 문제를 해결받지 못했다는 것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죽은 후 심판을 받아 지옥에 던져져 영원히 고통을 당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 사건을 동일하게 다루고 있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가룟 유다를 향하여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다’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구원의 객관적인 사건’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일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를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해준 사건으로 믿을 때에 ‘구원의 주관적인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과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그것이 여러분 죄 때문인 것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죄 문제를 해결받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아직 해결받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안에 2000년 전, 예수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것을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한 것으로 믿지 않는 분이 단 한 분도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누가는 ‘어떤 자’가 예수님을 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함께 21절을 다시 읽습니다.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여기서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식탁은 식사를 함께 나누는 장소인데 그 위에 예수님을 파는 자의 손이 함께 있다는 것은 식사를 같이 할 정도로 가까운 자가 예수를 판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누가가 예수님을 팔 자를 이렇게 기술한 것은 다른 세 복음서 기자와 크게 대조를 이룹니다. 마태복음(26:21)과 마가복음(14:18)은 제자중의 한 사람이라고 언급하였고, 요한복음(13:26)은 예수님을 팔 자를 직접 가룟 유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들과 다르게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복음서 기자마다 예수님을 팔 자를 다르게 기록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것을 근거로 성경의 오류를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는 성경의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자들이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저자를 성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사람들을 통하여 성경을 기록하실 때에 그들의 인격과 배경을 무시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의 내용이 저자의 관점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는 왜 예수님을 팔 자가 예수님과 함께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는 자라고 기록했을까요? 그것은 시편 41편 9절을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함께 읽습니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것은 구약성경의 예언의 성취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누가는 가룟 유다의 배신 사건을 구약성경의 예언의 성취로 해석했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해석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인생의 문제를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것은 제자가 스승을 배신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의 배신을 단지 제자가 스승을 배신한 것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흔히 세상에서 종종 일어나는 배신 사건의 일종에 불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칩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의 배신 사건을 구약 성경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고,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신 것을 믿음으로 재림신앙을 갖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사건을 맞던지 육신의 눈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말씀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생각해야합니다. 모든 사건을 말씀으로 해석하므로 사건의 배후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더 친밀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누가는 예수께서 가깝게 지내는 자에 의해 팔리실 것을 말하면서 무엇을 덧붙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22절을 읽습니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파는 그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인자의 사전적인 의미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왜 자신을 인자라고 칭하셨는지에 대해서는 학자 간에 이견이 있습니다. 바울 신학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김세윤 박사는 예수께서 ‘인자’(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자기 칭호를 사용하여 종말에 하나님의 새 백성(하나님의 자녀들)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 자신을 나타내고자 했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해 세계적인 신학자인 ‘하워드 마샬’은 김세윤 박사의 주장이 예수와 그의 복음을 좀 더 잘 이해하도록 도움을 준다고 극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는 인자를 받는 메시아에 대한 칭호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라고 칭하시면서 이미 작정된 대로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자신이 가까운 제자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곧이어 자신이 이미 작정된 대로 가시지만, 자기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22절). 이를 풀어 말하면 예수께서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팔려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만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는 화를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왜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가 화를 당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지 않았다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지 않았고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도리어 상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저는 이번에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해보았습니다. 그것은 ‘상벌론’을 통해서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어떤 자에게 상을 베푸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으면 결코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에 상을 받으시는 것이 마땅하지만, 가룟 유다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을 판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게 되었는지 추론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로 추론이 가능합니다. 첫째로, 거절에 대한 상처 때문입니다. 마태복음(26:7-16)과 마가복음(14:3-11)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 전에 향유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향유를 부은 여인을 책망했는데 예수께서는 오히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그 여인이 행한 것도 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향유를 부은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가룟 유다를 공개적으로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가룟 유다가 이에 대해 섭섭한 마음을 먹고 예수님을 배신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배신은 종종 상대방에 대한 섭섭함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번에 이명박 대통령이 결정적으로 구속된 것은 그의 측근들이 사실대로 실토했기 때문입니다. 왜 측근들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등을 돌렸습니까? 그들이 이명박 대통령에 대하여 섭섭한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의 반역으로 이스라엘백성들이 다윗을 배신하고 압살롬에게로 향할 때에 다윗을 버리고 압살롬의 모사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왜 압살롬을 떠나 고향으로 내려가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까? 압살롬이 다윗의 군대를 추격하는 일로 아히도벨과 후새를 불러 각각 그들의 의견을 물었을 때 압살롬이 자기의 의견을 거절하고 후새의 조언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조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데 대해 섭섭한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마귀의 시험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함께 요한복음 13장 2절을 읽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 생각을 넣었더라.” 즉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게 된 것은 마귀가 이미 그의 마음에 예수를 팔 생각을 넣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가 마귀의 시험을 받아 마귀에게 무릎을 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가룟 유다가 거절에 대한 상처로 예수님을 배신하여 팔았든지, 마귀에게 시험을 받아 예수님을 팔았든지 이는 모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것입니다. 따라서 가룟 유다는 결코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자신이 가까이 지내는 자들 중에 하나에 의해 배신을 당한다는 것을 ‘언제’ 말씀하셨는지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께서 이를 말씀하신 때는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 자리에 있을 때였습니다. 즉 예수께서 가룟 유다에게 팔려서 체포되시기 바로 직전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그런 상황에서 이를 미리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가룟 유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가룟 유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그 기회를 놓쳤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범사에 때가 있듯이 회개에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를 놓치면 회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기회가 마지막이 되기 전 회개해야 합니다. 오늘이 그 마지막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가룟 유다에게 회개할 기회를 마지막으로 주신 것을 통하여 또 다른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는 끝까지 사랑을 실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고 가룟 유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심으로 이를 실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신앙생활을 예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고 끝까지 원수를 사랑하신 것을 통하여 우리도 말씀을 가르친 대로 살 것을 결단해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23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들이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예수께서 “인자는 이미 작정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 중에 예수님을 팔 자가 있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 중에 하나가 바로 자신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보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일이 자신들과 저는 전혀 상관 없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았고 나머지 제자들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도망갔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인자는 이미 작정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자신이 바로 그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깨어 있었다면 그들이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듣는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바로 자기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 있다면 돌이켜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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