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룟 유다는 왜 예수님을 팔았을까? 누가복음 22장 1-6절 2018.4.29.

//가룟 유다는 왜 예수님을 팔았을까? 누가복음 22장 1-6절 2018.4.29.
가룟 유다는 왜 예수님을 팔았을까? 누가복음 22장 1-6절 2018.4.29.2018-12-03T23:46:4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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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은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공모하여 예수님을 파는 과정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 한 때가 유월절이었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유월절이라고 하는 무교절’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유월절을 무교절이라고도 불리는 것일까요? 유월절 한 주간 내내 누룩 없는 떡, 즉 무교병을 먹기 때문입니다. 무교병은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을 가리키는데 누룩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부풀리지를 않아 딱딱하고 맛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딱딱하고 맛없는 무교병을 먹는 유월절을 대대로 지키라고 하셨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주된 이유는 누룩 없는 빵은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그리스도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모든 제사와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따라서 구약의 제사와 절기를 유대인들의 절기로만 이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구약의 제사와 절기를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하게 지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대대로 지키라는 명령을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성전에서 동물을 죽여지만 지킬 수 있는 제사나 절기를 지키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통하여 유월절을 지키고 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찬식을 통해서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지만 우리는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유월절에 예수님을 무슨 방도로 죽일지를 궁리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절을 다시 읽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도로 죽일까 궁리하니 이는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본문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지를 궁리했던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백성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왜 그들이 백성들을 두려워했을까요? 그 이유를 알려면 당시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당시 유대종교 지도자들과 이스라엘백성들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전혀 달랐습니다.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거짓 메시아로 생각하고 있었고, 이스라엘백성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하고 추종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만일 유대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폭동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이 점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지를 궁리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일반백성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추종했는데 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거짓 메시아로 생각하여 죽이려고 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유대종교의 지도자들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해서 박식했습니다. 특별히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성경복사를 필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일을 주도적으로 한 자들이 서기관들이었는데 그들은 더더욱 성경에 관한한 박사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도 서기관의 성경 실력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셨습니다(막 12:34). 그런데 왜 그들이 성경박사인데 성경대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성경을 잘못 읽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는 우리와 동일한 성경을 사용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소위 기독교 이단이라고 불리는 자들도 우리와 같은 성경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왜 같은 성경을 사용하는데 이단들이 나올까요? 그들이 성경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절대로 자신의 생각을 넣어서 읽으면 안 됩니다. 특별히 메시아를 자기 생각대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를 통하여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읽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읽어야 성경을 제대로 읽는 것입니까?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어졌기 때문에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로 읽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으로 읽지 않고 각자의 생각으로 성경을 읽으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잘못 읽으면 같은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추구하는 방향은 전혀 다릅니다. 자기복음은 자기중심적인 신앙을 갖게 하지만 성경복음은 하나님의 중심적인 신앙을 갖게 합니다.

    성경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파는데 누가 개입을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3-4절을 읽습니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매.” 사탄이 가룟 유다에게 들어가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경비대장들에게 찾아가서 예수님을 넘겨 줄 방도를 의논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사탄의 공격과 유다의 배신이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귀는 이간자라는 뜻을 갖고 있듯이 마귀가 역사하는 곳에는 관계의 단절이 발생합니다. 마귀의 공격을 받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사람과의 관계가 단절됩니다. 가룟 유다와 예수님은 사제지간이었지만 사탄이 유다의 생각을 파고 들어가자 예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고 예수님을 팔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귀가 공격할 틈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틈이 생기지 말게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틈이 생기지 않을까요? 주님과 대화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대제사장의 뜰 안에서 비자 앞에서조차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던 것은 그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시간에 피곤해서 잠을 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왜 마귀가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필이면 가룟 유다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은 왜 마귀가 가룟 유다를 공격했는지를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른 복음서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에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은 것에 대해 예수님과 가룟 유다의 반응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5절)고 마리아의 행위를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가만 두어라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7-8절)고 마리아를 칭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가룟 유다를 공개적으로 책망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때에 가룟 유다가 섭섭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마귀가 이를 알고 가룟 유다를 공격하여 그의 마음에 예수를 팔 생각을 넣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책망을 들어야 할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책망을 들었는데 섭섭한 마음이 들면 반드시 배후에는 마귀의 공격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섭섭한 마음이 들면 즉시 마귀를 물리쳐야 합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국 마귀의 공격에 무너져서 아무리 좋은 관계라 할지라도 한 순간에 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가룟 유다가 정말 예수님의 제자라면 책망받을 때에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요? 예수께서 자신의 생각을 아셨다고 생각하고 회개했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수리에 밝은 마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가 마태를 제치고 예수님 공동체의 돈궤를 맡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께서 그를 신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이런 예수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돈궤에서 돈을 훔쳐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런 사실을 아시고 향유사건을 계기로 책망하신 것인데 이를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마귀의 속임에 넘어가서 예수님을 은 삼십에 넘겨주었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그들에게 돈을 받기로 한 후 어떻게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5-6절을 읽습니다. “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성경은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과 서기관이 돈을 주겠다는 언약을 하자 무리가 없을 때에 예수님을 넘겨 줄 기회를 찾기 시작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사탄이 유다로 하여금 예수님을 배신하게 할 때에 돈을 매개체로 삼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 사탄이 가룟 유다로 하여금 예수님을 배신하게 하는데 돈을 매개로 삼았을까요? 마귀가 돈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돈이 얼마나 대단한 힘이 있는지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렇습니다. 돈은 하나님과 맞먹을 정도로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돈의 힘을 절대로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돈은 ‘그까짓’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돈으로만 살도록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도록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돈으로만 살려고 하지 말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돈의 힘에 눌려서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면 어떻게 될까요? 딤전 6장 10절은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그렇습니다. 돈을 앞세우면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서 근심가운데 살아가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는 유다가 받은 돈이 얼마인지를 밝히고 있지 않지만 다른 복음서 기자는은 삼십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마 26:15). 당시 은 삼십은 노예 몸값에 해당합니다. 왜 대제사장이 그 가격에 예수님을 넘기라고 흥정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노예로 취급하므로 예수님을 유대민중을 혼란시킨 죄인으로 인식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께서 이렇게 은 삼십 냥에 팔리실 것이 스가랴서에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그들이 곧 은 삼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슥 11:12-13). 즉 대제사장이 경멸하기 위해 예수님을 은 삼십 개를 넘겨받았지만 이는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취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냥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일을 만나도 상황만 보지 말고 그 상황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참고적으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은 삼십에 예수님을 넘겨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나는 스승을 팔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어. 스승의 운명은 내 손안에 있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의 운명이 가룟 유다의 손에 달려 있었습니까? 모든 것이 착각입니다. 마귀는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속여서 먹게 했던 것처럼 우리 자신을 과대하게 생각하도록 합니다. 우리가 자기 마음대로 뭔가를 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죄를 짓고 심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부르시면 모든 것을 남겨둔 채 가야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마귀가 공격할 때에 넘어지지 않고 영적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넘어지는 것은 자신을 실제 이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공모하여 예수님을 배신하고 은 삼십에 팔아넘기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사탄이 주도했음도 겼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과연 가룟 유다가 3년 동안 모시고 섬겼던 주님을 은 삼십에 팔아넘긴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느냐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것은 가룟 유다가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알았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탄이 하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게 합니다. 제가 여름옷이 마땅치 않아서 아주 가성비가 좋은 옷을 파는 black이라는 매장에 갔습니다. 옷이 맞지 않아 수선해서 찾는 과정에서 점장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는 부모님이 신앙생활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도 가끔씩 나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혹시 복음에 대해 들어보았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즉시 복음을 전했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고 교회에 다니기도 하지만 복음을 모르고 있었을까요? 그가 예수께서 구원자이심을 믿으면 구원받기 때문에 마귀가 이를 믿지 못하도록 방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는 것만 방해하지 않습니다. 그와 동시에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의 인생에 진짜 주인이심을 인정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만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자기 생각과 감정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실 뿐 아니라 주인이심을 온전히 깨닫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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