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에게 임한 은혜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사도행전 22:1-11절 2020.6.7

//바울에게 임한 은혜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사도행전 22:1-11절 202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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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사도행전 21장 27-40절 말씀을 통해서 몇 가지 주의 교훈을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살펴보고 오늘 말씀을 통하여 주의 음성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누가는 왜 무리들이 바울을 끌고 성전 밖으로 끌려나갔을 때 문들이 닫혔다고 기록했냐는 것입니다. 곧 성전에 대한 심판이 행해질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시기는 A.D. 63-64년 경인데 A.D. 70년에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므로 그의 암시가 성취되었습니다. 코로나19도 미래 시대에 대한 징조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이는 곧 건물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게 될 터이니 이를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즉 평신도가 사역하는 평신도사역형교회로 빨리 전환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천부장이 성에 소요가 발생했을 때 급히 달려간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천부장이 치안에 책임이 있기에 급히 달려온 것이 같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바울을 살리시기 위해 그를 급히 보내신 것이라는 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만 건져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지금껏 살아오면서도 수없이 많이 경험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위기를 맞이할 때마다 건져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위기를 맞이해도 낙심하지 말고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셋째로, 무리들이 바울을 끝까지 따라가며 그를 없이 하자고 외친 것을 통해 무엇을 교훈받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무리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끝까지 따라갔듯이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영원히 철천지원수이지만 그에게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파멸에 이르게 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서 제자 삼으라’는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끝까지 대상자를 찾아 나서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천부장에게 로마시민이라고 밝히지 않고, 층대에서, 헬라어로, 조용히 한 후에 복음을 전한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는 되는 대로 복음을 전하지 않고 전략적으로 전했습니다. 마귀도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공격하지 않습니다. 약한 틈을 공격합니다. 하물며 우리가 전략을 갖고 전도하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최고의 전도전략은 제자훈련입니다. 성령으로 제자 삼아야 합니다. 금 년에 단 한 명이라도 전도해서 제자 삼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자신을 붙잡은 무리들을 향하여 구원 간증, 즉 자신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먼저 그는 ‘부형들’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는 영어로 ‘Brothers and fathers’인데 최상의 존칭어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을 존중하는 자세로 말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바울과 그들의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입니다. 한마디로 원수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렇게 말했기에 놀라며 그가 무슨 말을 할지에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즉 바울이 그들에게 ‘부형들’이라고 한 것은 이는 일종의 아이스브레이크를 한 것입니다. 우리도 복음을 전할 때에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 아이스 브레이크를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관심을 가지지 않은 자에게 전해지는 복음은 돼지에게 진주 목걸이를 걸어주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2-3절을 읽습니다. 그들이 그가 히브리 말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 이어 이르되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바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군중들에게 가장 먼저 한 말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당대 최고의 율법 선생인 가말리엘의 문하생이 될 정도로 율법에 열성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가 이렇게 말했을까요? 그것은 무리가 바울이 유대인과 율법을 비방한다고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해가 있다는 것은 관계가 뒤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관계가 안 좋은 상황에서는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상대방이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 것은 그들의 오해를 풀어서 자신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좋은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제가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메시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관계입니다. 즉 관계가 좋지 않으면 아무리 진리를 말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전도에 성공하려면 평소 대상자와의 관계를 친밀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독교를 철저하게 박해하였다고 말합니다. 4-5절을 읽습니다.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그가 박해를 넘어서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고 사람을 죽이려고 다메섹까지 갔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한 의도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자기를 핍박하고 있지만, 자신은 과거에 그들보다 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먼저 실패한 과거를 드러낼 때 동질감을 느끼게 되어 상대방이 마음의 문을 엽니다. 예수께서 최고의 치유자가 되시는 것은 먼저 받은 상처를 치유하셨기 때문입니다. 치유받은 자가 치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손경이라는 성폭력상담 전문가는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성폭력상담전문가가 된 것은 남편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 말 후 자기에게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를 말합니다. 6-8절을 읽습니다.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그가 믿는 자들을 박해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데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자기를 둘러 비치며 자기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며 ‘왜 나를 박해하느냐’는 소리가 들렸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한 것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싶어서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찾아오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계획과 생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찾아오셔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때를 모르기 때문에 포기하지 말고 계속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바울에게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물으셨을까요? 예수께서 바울이 핍박하는 이유를 모르셨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가 예수님을 거짓 메시야로 생각하고 핍박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이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주님이 우리를 만나시면 어떤 질문을 하실까?” 아마도 이렇게 질문하실 것입니다. 너 왜 나를 증거하지 않느냐?” 바울은 예수께서 누군지를 몰랐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을 박해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주인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종은 주인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예수께서 그리스도인 줄 알면서 그분을 전하지 않습니까?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는 아직 예수께서 진짜 그리스도이심을 모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마귀에게 속아 다른 것에 관심을 쏟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바울은 예수님을 직접 박해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박해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공동체인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교회를 박해하느냐고 묻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박해하느냐고 물으셨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교회를 박해한 것은 곧 예수님을 박해한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일을 감당하는 일에 드린 시간과 물질과 몸은 곧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바울에게 하신 말씀을 들은 자가 누구였습니까? 9절입니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바울과 함께한 일행이 바울과 같이 빛을 보았지만, 바울에게 하시는 말씀은 듣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제가 설교를 하는데 다른 사람은 다 듣지 못하고 한 사람만 들은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일어난 사건이 사람이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구원받으면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6장 31절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가족이 구원을 받는다”고 한 것도 그런 뜻이 아닙니다. 간수장이 먼저 구원을 받으면 다른 가족들도 이를 본받아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만났는지를 체크해야 합니다. 단지 바울과 함께 다메섹으로 갔던 일행이었는지, 바울처럼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났는지를 체크해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모태신앙을 가진 자들이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난 경험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문화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인데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한 자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개인적으로 예수께서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지 않으면 거듭난 자가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찾아오신 분이 주님이신 것을 깨닫자 어떻게 했습니까? 10절입니다.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그는 곧바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물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거듭나자마자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뜻이 계셔서 자기를 구원하신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무 이유 없이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있기에 부르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고 말한 것처럼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복음을 전하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바울의 질문에 주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10절을 다시 읽습니다.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바울에게 다메섹으로 가라고 하시면서 그곳에서 그에게 해야 할 일을 가르칠 자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굳이 가르칠 사람을 준비하였을까요?(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다음 주에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만나주셨지만, 그 후에 사람을 통하여 그에게 할 일을 가르치도록 하신 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역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므로 혼자서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말씀 한마디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만드신 후에는 혼자서 하시지 않고 사람과 같이 일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을 만드신 후에는 이 세상을 사람에게 관리하라고 위임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이 세상에 충만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은 단지 생물학적인 의미로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영적으로 생육하고 번성하는 최고의 방법은 제자훈련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가서 제자 삼으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바울이 어떤 상태에서 아나니아에게 인도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11절을 읽습니다. 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멀쩡하던 사람이 눈이 멀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습니다. 한순간 사람의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가고 싶은 곳을 가던 자가 이제는 다른 사람의 안내를 받아야만 되었습니다. 거듭난 자의 삶은 바로 이것입니다. 과거는 자기 생각과 계획대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다메섹까지 가서 그리스도인을 잡아 오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영접하면 예수께서 우리의 구원자와 주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미래학자들이 미래에 대한 전망을 말하지만 맞을 확률이 극히 저조합니다. 점술가의 예언보다도 틀린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변화에 영향을 주는 요소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미래가 불투명해도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가서 제자 삼으라’는 명령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지키시므로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은혜를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0-06-07T09:35:02+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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