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사도행전 15장 36-41절 2019. 10.13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사도행전 15장 36-41절 2019. 10.13

지난번 강해에서 예루살렘공의회가 하나의 구원론, 즉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에 일치된 결론을 도출해내는 과정에서 그들의 설득이 절대적이었다고 말씀드리면서 이를 통해 무엇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까? 교회가 진리를 추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와 못지않게 하나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비전공동체입니다. 따라서 하나 됨을 이루어야 합니다. 교회가 나뉘는 순간 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가 아닙니다. 왜냐면 교회는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유기적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동일한 구원론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계 복음화를 위해 크고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이 하나의 구원론을 도출해내기 위해 생각이 다른 자들을 어떻게 설득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까? 말씀으로 설득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 안에서 동일한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생각은 여러 사람이 동의해도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그런데 말씀으로 설득을 해도 상대방이 쉽게 생각을 바꾸지 않기 때문에 인내하고 반복해서 설득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전도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자들을 설득하는 것이므로 비신자들을 전도한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죄를 지어야만 죄인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하고, 그들은 남녀가 성적인 관계를 가지므로 생명을 출산할 수 있는데 우리는 예수께서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고 하고, 그들은 한 번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죽은 후에 심판받아 지옥에 던져져 영원히 고통을 당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나바와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에 마가 요한을 함께 데리고 가는 문제로 다툰 후 서로 다른 지역으로 가서 전도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36절을 읽습니다.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본문에서 바울이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이란 바울이 1차 전도여행 중에 갔던 지역입니다. 즉 구브로 섬,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시 1차 전도여행을 했던 지역을 다시 방문한다는 것은 쉬운 게 아닙니다. 왜냐면 그들이 1차전도 여행 중에 여러 곳에서 핍박을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일도 겪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그렇게 고생한 지역에 가보고 싶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좋지 않은 추억이 있는 장소는 다시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어려움을 당한 곳으로 다시 한 번 가지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36절 말씀대로 ‘형제들이 어떠한가’를 살펴보기 위해서입니다. 즉 자신이 전한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자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모습을 통해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바울이 얼마나 영혼을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생명보다 자신이 전한 복음을 듣고 거듭난 자들의 영혼을 더 사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전도자의 마음이고, 목자의 마음이고, 모성애입니다.

제품을 팔면 A/S를 해줍니다. 보증기간 안에는 횟수에 상관없이 A/S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제가 놀란 사실은 코스트코는 자신들이 판매에 제품에 대한 A/S가 국내 대형유통업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물건이든지 어떤 이유로든 반품을 요청하면 전액 환불을 해줍니다. 심지어 2년 동안 의자를 사용했는데 고장 났다고 하니까 반품을 해주었습니다. 우리가 파는 복음이라는 상품은 A/S가 더욱더 필요합니다. 왜냐면 복음은 영원한 생명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낳아놓기만 하고 돌아보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혹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진정한 부모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전도했는데 그 사람이 말씀 안에서 잘 자라도록 있는지 돌보지 않는다면 영적인 부모의 자세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해서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계속해서 영적인 A/S를 해야 합니다. 영적인 A/S가 무엇입니까? 바로 제자훈련입니다. 제자훈련은 한마디로 복음을 전해서 구원받게 하고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전도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영혼을 극진히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바울과 바나바에게서 아주 실망적인 모습을 접하게 됩니다. 37-39을 읽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한마디로 바나바와 바울이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는 문제로 서로 다투고 각각 제 길로 갔다는 것입니다. 먼저 마가요한이 1차 전도여행시 왜 도중에 집으로 돌아갔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마가가 왜 첫 번째 선교 여행 도중에 팀을 이탈하여 떠났는지에 대해 침묵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4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첫째로, 그가 비교적 짧은 거리, 즉 ‘단기 선교’로 생각하고 전도 여정에 함께 했는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구브로 섬에서 밤빌리아 지방으로, 다시 갈라디아 지방으로 옮겨가는 멀고 긴 여정이라는 것을 알고서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문화적 충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마가 요한의 성장배경과 선교지 문화의 갭이 컸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마가 요한은 부유한 집안 출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실은 그의 어머니가 마리아인데 그녀의 집에서 120여 명이 모여서 기도할 정도로 큰 집인 것을 보면 그가 부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로, 삼촌인 바나바가 구브로 섬에 온 후부터는 바울에게 밀려나는 것을 보고 분개한 나머지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바보에 오기 전까지는 바나바가 바울보다 앞서 나와 있습니다(행 13장 13절). 넷째로, 밤빌리아 북부의 험한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갈라디아 지방으로 갈 것을 생각하고는 미리 겁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마가 요한이 중도에 돌아간 이유를 성경을 근거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먼저 사도행전 134-5절과 13을 각각 읽습니다.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13:4-5).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13:13). 저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거친 풍랑과 뱃멀미로 전도여행에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구절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바울 전도팀이 1차 전도여행을 할 때 배를 두 번이나 탔습니다. 한번은 실루기아에서 구브로로 갈 때, 다른 한 번은 바보에서 밤빌리아 버가로 갈 때입니다. 그런데 실루기아에서 구브로까지는 약 142km이고, 바보에서 밤빌리아 버가까지는 약 180km입니다. 이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당연히 바다 한가운데서 풍랑 등으로 여러 번 위기를 맞이했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6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고후 11:26). 이것은 바울이 여러 차례 전도 여행을 하면서 당한 것을 소개한 것입니다. 여기에 ‘위험’이라는 단어가 8번이나 나오는데 이 중에서 마가 요한과 함께 전도 여행 중에 겪은 위험은 어떤 것일까요? 저는 ‘바다의 위험’이라고 생각합니다. 마가는 두 번의 항해에서 배를 집어삼킬 듯한 풍랑을 맞이하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또 배를 타면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뱃멀미입니다. 큰 배를 타면 별로 뱃멀미를 하지 않지만 당시는 범선이었기 때문에 뱃멀미가 엄청 났을 것입니다. 뱃멀미를 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구토가 나오고 어지러워서 정신을 차릴 수 없습니다. 이렇게 두 번이나 뱃멀미로 고생했기 때문에 남은 전도 여행에 자신감이 없어졌을 것입니다.

둘째로, 1차 전도여행에 대한 목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마가 요한이 수행자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행자라는 뜻은 ‘배 밑에서 노 젓는 사람’을 뜻합니다. 모세와 여호수아와의 관계, 엘리야와 엘리사와의 관계를 나타날 때 적용되는 단어입니다. 다른 번역에서는 ‘섬기는 자’, 또는 ‘수종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요한이 수행자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가 1차 전도여행을 주도하는 자가 아니고 단지 심부름꾼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1차 전도여행에 대한 분명한 목표가 없었습니다. 목표가 없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상황에 따라 좌지우지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두 번의 항해로 위험을 당하자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지금 2030123007000의 비전을 갖고 세계복음화를 위한 진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일에 수행자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이 일에 주인공이라고 생각해야 힘들고 어려워도 끝까지 이 사역에 목숨을 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2차 여행을 떠나면서 마가 요한을 함께 데리고 가자고 하자 바울과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아마도 바나바는 전에는 마가 요한이 나이가 어려서 중도에 집으로 돌아갔지만 앞으로 잘하면 되니까 함께 데리고 가자고 주장했을 것이고, 바울은 1차 전도여행에서 별로 어렵지도 않았는데 집에 갔기 때문에 2차에도 또 그렇게 할 것이라며 안 된다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사실 바나바의 주장도 일리가 있고 바울의 주장도 일리가 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이 의견 차이로 서로 피차 다투고 갈라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몇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사람은 성령의 충만을 받아 열심히 일해도 여전히 실수하고 넘어지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다툰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 때문이 아닙니다. 마가 요한을 함께 데리고 가느냐 마느냐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는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서로 양보하지 못하고 다투고 갈라섰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당시 바울과 같은 전도팀에 있었다고 합시다. 여러분 같으면 마가 요한을 함께 데리고 가느냐 마느냐를 갖고 다투고 갈라지겠습니까? 그럴 사람은 단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2인자로 불리는 바울이 아주 사소한 일로 자기를 사역의 장으로 이끌어준 바나바와 다투고 갈라섰습니다. 이것을 통해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아무리 대단한 사역을 할지라도 인간은 실수하고 넘어지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해도 여전히 옛사람의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이 강하고, 혈기가 있습니다. 육신적인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믿음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행하기도 합니다. 믿음이 좋다고 늘 얼굴에 광채가 나고, 어깨에 날개가 돋아나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세미나 할 때 종종 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생각해야지 믿음의 대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더욱 사랑하기로 하고 주님은 더욱 굳게 믿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둘째로, 개인감정으로 주의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39-41을 보시기 바랍니다.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둘은 서로 다툰 후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바나바는 마가요한을 데리고 구브로로 떠났습니다. 그들은 다투었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지혜가 필요합니다. 얼마든지 서로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다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다투었다면 그것으로 끝내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주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면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 사소한 일로 서로 싸워서 인간관계뿐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도 무너뜨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누구 때문에 교회에 가기 싫다는 사람들이 교회마다 차고 넘칩니다. 이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마귀의 시험을 받아 넘어진 것입니다.

셋째로, 상대방과 다투어도 화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견해나 주장과 달라서 다투고 갈라지면 그와는 아예 상종조차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나중에 마가 요한을 ‘나의 동역자’(몬 24)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역 말기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리라”(딤후 4:11)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결국 불편한 관계를 회복했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마가와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원수까지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온전히 깨달았기 때문에 마가 요한의 실수를 용서할 수 있었고 그를 다시 불러 함께 사역한 것입니다. 신앙의 성숙이 무엇입니까? 자신과 다른 사람을 용납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와 못지 않게 사람을 향하여 관용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심판자는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분께서 오셔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4:5)고 말한 것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도록 성숙해져야 합니다(엡 4:13).

넷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실수를 통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마가 요한의 문제로 심하게 싸우고 갈라졌습니다. 이때 마귀는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두 사람의 싸움을 통하여 새 일을 행하셨습니다. 마가는 사역 초기 미성숙함을 보였지만 이 일 이후로 더 성숙해졌습니다. 이는 나중에 마가가 복음서를 쓴 것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마가가 그 일로 실족했다면 마가복음을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다투고 나서 갈라져서 각각 다른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갔고,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구브로 섬으로 갔습니다. 만약에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다투지 않았다면 한 지역에서만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마귀는 전도하지 못하도록 서로 다투고 갈라지게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더 많은 곳에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사소한 일로 다투고 갈라졌지만 오히려 전도팀은 두 개가 되어 더 많은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이 전부가 아닙니다.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아버지이심을 믿고 눈에 보이는 것에 좌우되지 말고 오직 가서 제자 삼으라는 주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달려가는 더처치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9-10-13T09:00:4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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